미국 경제주간지 블룸버그비즈니스위크 18일자 표지는 ‘당신을 위한 북한 투자 가이드(Your North Korea Investment Guide)’란 큼직한 제목으로 뒤덮였다. 글씨체는 북한 TV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새빨간 글씨체를 닮았다. 제목만으로 독자를 사로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잡지에는 ‘김정은의 가스관 사업’ ‘아는 사람만 아는 북한 채권’ 등의 분석기사가 가득했다. 6·12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에 눈을 돌린 투자가가 그만큼 많아서일 것이다.
블룸버그도 주목한 북한 채권은 요즘 해외 펀드 매니저들에게 핫이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북한 채권이 기사에 줄줄이 나오는 게 이상하기도 하다. 북한이 국채를 발행한 적은 있는지, 아직 대북제재가 살아있는데 북한 채권이 유통은 될 수 있는지 의아한 일이다. 미국 외교안보 전문매체 디플로맷이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20일 북한 채권의 실체를 추적했다. 매체에 따르면 북한이 국채를 발행했던 건 사실이다. 1940, 50년경 ‘인민경제개발채권’을 발행했는데 만기는 너무도 오래전인 1960년 10월 1일이었다. 북한이 빚을 다 갚았는지, 만기가 연장됐는지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2003년 발행된 ‘인민생활공채’는 2013년경 만기가 돌아온 것으로 알려졌지만 역시 행방을 알 길이 없다. 설사 두 채권이 수차례 만기 연장 끝에 지금까지 존재한다고 해도 대북제재 때문에 북한 밖에서 유통될 수 없다.
알고 보니 요즘 ‘북한 채권’이라 불리는 상품은 해외 금융사들이 만든 북한 자산 관련 파생상품이었다. 프랑스계 국제금융회사 BNP파리바가 만든 ‘NK 부채기업’이 대표적이다. 북한이 누구한테 어느 정도의 돈을 빌렸는지 알려지지 않아 상품 이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사실 이런 사정이 있었다. 1970년대 북한은 30개국의 140개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았는데 갚질 못했다. 1987년 일부 채권자가 북한의 자산을 담보로 잡았지만 불행히도 소용이 없었다. 이 과정을 유심히 지켜본 BNP파리바는 1997년 북한으로부터 돈을 받을 권리를 채권자들로부터 사들였다. 이 권리를 거래할 수 있는 파생상품을 만든 것이다. 통일이 되면 남이든 북이든 빚을 갚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투자자들을 모았을 것이다. 전문가들은 투자 위험성을 경고하지만 한반도 평화 국면이 올 때마다 이 상품은 화제가 된다.
‘평화 호재’ 기대감은 쉽게 식지 않을 듯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까지 나서 몇 번이고 북한 부동산 시장의 잠재력을 거론했다. 워런 버핏, 조지 소로스와 함께 세계 3대 투자가로 꼽히는 짐 로저스 ‘로저스홀딩스’ 회장도 26일 자신의 블로그에 “북한 투자가 합법화되면 가능한 한 빨리 투자할 절차를 밟겠다. 지금은 북한 증시가 없으니 먼저 한국 주식을 사야 한다”고 조언했다. “북한 경제의 문호가 열리면 여행이 급증할 것으로 보고 한국 항공사 주식을 사놨다”고도 공개했다. 그는 지난해 3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북한과 가까운 러시아 동부 블라디보스토크에 투자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 당시는 한반도가 냉랭하게 얼어붙은 시기였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벌써 국내에서는 북한 경제가 열리면 대동강변에 ‘트럼프 호텔’이 들어서고 평양역 앞에 ‘맥도날드’가 문을 열 것이란 장밋빛 전망이 나온다.
우리와 비슷한 길을 간 독일의 산업현장은 이런 기대가 허상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이달 초 취재차 방문한 베를린에서 만난 사람들은 통일 독일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정부가 주도적으로 새로운 틀을 짰다고 강조했다. 통일된 독일 정부와 베를린시는 서로 다른 체제의 경제인들이 협력할 수 있는 ‘아들러스호프’ 첨단 과학단지를 만들고 특화 업종을 정해 집중 육성했다. 임대료 할인 등의 혜택을 준 건 물론이다. 동독 출신의 과학자와 서독 자본가들이 만든 창업 기업들은 이제 탄탄한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단지에 입주한 기업들의 연평균 성장률은 6∼8%에 이른다. 한반도가 독일처럼 통일이 되든, 북한 시장이 개방되는 데 그치든 협력의 결실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북한 투자를 두고 세계가 시끌시끌한 와중에 누구보다 진지하고 활발하게 북한 투자를 논의해야 하는 주체는 한국일 것이다. 대북제재가 끝나지 않았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북한 경제 개방 시대를 미리 대비해야 한다. 한동안 멈춰 있던 대북 사업 연구도 최근의 현실에 맞게 재정비하고 속도를 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이토록 관심이 뜨거운 해외 큰손들에게 평화 호재의 과실을 내주고 땅을 칠 수도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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