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신념 등을 이유로 입영을 거부하는 이른바 ‘양심적 병역 거부’가 사회적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01년 12월 불교 신자이자 시민단체 활동가인 오태양 씨(당시 나이 27세)가 공개적으로 병역 거부 선언을 하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내면서부터다. 그 전까지 이 문제는 ‘여호와의 증인’ 같은 소수 종교 신자들의 일로 여겨졌다. 불교 신자인 오 씨가 등장하면서 특정 종교의 문제에서 보편성을 띤 인권 문제로 판이 커진 것이다.
오 씨의 선언 한 달여 만인 2002년 1월 29일 서울지법 남부지원(현 서울남부지법)은 정당한 사유 없이 입영을 거부한 이를 처벌하도록 한 병역법 제88조 1항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등 진보 진영이 지원 사격에 나섰고, 정부와 국회도 대체복무제 도입 논의를 시작했다. 그때는 당장 해결책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2004년 8월 “양심의 자유는 중요한 기본권이지만 법질서에 대한 복종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는 아니다”며 합헌 결정을 내렸다. 이후로도 헌재는 2011년까지 두 차례 더 합헌 결정을 거듭했다. 그 사이 처음 위헌심판 제청을 했던 박시환 부장판사는 ‘변호사-대법관-대학교수-정부공직자윤리위원장’으로 4차례나 직업이 바뀌었다.
“‘양심적 병역 거부’가 아니라 다른 용어를 선택했다면 여기까지 오는 데 17년씩 걸렸을까요?” 헌재가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 대체복무를 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해야 한다고 결정한 지난달 28일, 대체복무제 도입을 공개적으로 지지해온 서울지방변호사회의 한 간부는 “양심적 병역 거부는 ‘양심’이란 단어 덕분에 큰 관심을 끌었지만 그 때문에 논의가 더뎌졌다”고 말했다.
양심적 병역 거부는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에 따라 병역을 거부한다는 의미다. 다른 사람과 다른 내 양심의 판단에 따라 살 자유, 즉 양심의 차이를 인정해 달라는 뜻이다. 하지만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용어는 그런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했다.
양심은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적 의식이다. 군 복무를 정당한 의무로 여기는 대다수 국민에게 양심적 병역 거부는 심기를 건드리는 어휘 선택이 됐다. 당장 ‘병역 거부가 양심적이면 군 복무는 비양심적이냐’는 반응이 튀어나왔다. 양심은 남이 들여다볼 수 없는 내면인 까닭에, 병역 거부가 양심적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분할 거냐는 우려도 제기됐다. 이는 헌재 결정 이후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누리꾼들의 부정적 반응을 봐도 여전하다. 처음부터 양심적 병역 거부 대신 최종 목표인 대체복무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피할 수 있었을 반대였다.
헌재 결정으로 대체복무제 도입이라는 큰 방향은 정해졌다. 이제는 병역 거부를 어디까지 인정할지 정하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한다. 이 문제는 보기보다 단순치 않다. 지금까지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 뭉뚱그려졌던 이들 사이에도 생각 차이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집총은 거부해도 비전투 업무는 할 수 있다는 이들이 있는 반면 정반대편에는 군이나 전쟁과 관련된 일은 일절 못 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 중에는 “대체복무 인력을 관리할 부서도 국방부가 아닌 다른 기관으로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도 있다. 군 복무와 대체복무 사이에 형평을 맞추는 일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양심’의 족쇄에서 풀려난 대체복무 논의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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