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그룹의 한 계열사 사장 얘기다. 금쪽같이 키운 딸이 같은 그룹 다른 계열사에 취업했는데 매일 자정이 다 되어 퇴근한다. 남자 친구를 사귈 시간을 내기는커녕 폭탄주 회식에 몸을 못 가눌 때도 적지 않다. ‘도대체 조직을 어떻게 관리하는 거야.’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딸 회사 사장을 마주칠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내색은 못 한다. 속병이 날 지경이다. 재계에서 제법 화제가 된 오래전 얘기다.
이제 이런 에피소드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로 기억될 것이다. 이달부터 본격 시행된 근로시간 단축 덕분이다. 과로로 탈이 났던 문재인 대통령은 엊그제 업무에 복귀하면서 근로시간 단축이 노동 생산성을 향상시켜 기업 경쟁력도 높인다고 했다.
한국 못지않은 과로사회로 꼽혔던 이웃 나라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도 “근무 관행 개혁은 노동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최선의 수단”이라며 ‘일하는 방식 개혁’에 힘을 쏟고 있다. 2015년 12월, 도쿄대를 졸업하고 유명 광고회사 덴쓰에 입사한 24세 신입 여사원이 월 100시간이 넘는 살인적인 초과근무를 견디다 못해 자살한 사건이 계기였다. 일본 의회는 지난주 초과근로 시간을 월 100시간, 연 720시간으로 제한하는 ‘과로사 방지법’을 통과시켰다.
두 정상의 호소가 아니더라도 근로시간 단축은 이제 불가피한 시대가 됐다. 농업적 근면성에 의존했던 2차산업의 시대는 가고, 아이디어와 창의력으로 승부하는 지식경제 시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근로시간을 단축한다고 저절로 지식경제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미국 리서치 회사인 갤럽은 2016년까지 3년간 직장인들의 일에 대한 열정(engagement)을 국제 조사해 재작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열정을 갖고 적극적으로 일하고 있다’는 응답이 한국은 7%로 일본(6%)과 함께 바닥권이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인이 일벌레라는 상식은 이제 옛말”이라며 “주어진 일을 시키는 대로 하는 수동형 근면성은 높지만, 주체적으로 일하는 자세가 부족한 현실은 지극히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 열정 없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직장에서 혁신이 가능할 리 없다는 것이다.
한국이라고 다를 바 없다. 직원들의 열정과 아이디어를 살리기 위해서는 조직 문화 혁신이 필수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왜’라고 물어볼 수 있는 조직 문화를 커뮤니케이션 활성화의 선결 조건으로 꼽았다. “외국인 중역들에게 한국 기업에서 일할 때 가장 힘든 게 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술이냐고 했더니 그건 괜찮다고 하더라. 그럼 뭐냐고 했더니 업무 할 때 ‘왜’라고 물으면 한국 사람들은 화낸다고 하더라. 일 시킬 때 그걸 왜 해야 하는지 설명해야 하는데 그게 없다는 것이다.”
기업뿐만이 아니다. 고위공직자 A 씨는 옛 일화를 얘기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청와대 지시를 장관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밑으로 전달하고, 차관 국장 과장을 거쳐 사무관에게 최종 숙제가 떨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사무관은 ‘왜’라고 묻지도 못하고 더듬더듬 시나리오 1안부터 4안까지 밤샘하여 준비해 올린다. 오답으로 판명나면 이 과정이 되풀이된다. 비효율도 이런 비효율이 없다.” 취임하자마자 일하는 방식 개혁에 나선 민간 출신 유영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우수하다는 관료들이 하는 일의 70%가 자료 작성이더라”고 한탄했다.
근로시간도 주는데 불합리한 권위와 상명하복 문화, ‘알아서 잘해 봐’ 문화가 고쳐지지 않으면 생산성 향상이건, 지식경제건 공염불일 수밖에 없다. 근로시간 단축으로 지식경제의 하드웨어를 깔았다면, 이제 조직문화 혁신으로 소프트웨어를 완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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