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이야기]디지털보다 아날로그, AI보다 직관이 좋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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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성 케이웨더 예보센터장 한국기상협회 이사장
반기성 케이웨더 예보센터장 한국기상협회 이사장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을 아십니까?” 필리핀의 오지인 코르디예라스의 계단식 논에 붙여진 말이다. 하늘에 닿을 듯 계단식 논이 이어져 원주민들은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이라고 부른다. 가파른 산악지대에 사는 이곳 원주민들은 산비탈에 돌을 쌓아 둑을 만들고 물을 가둬 벼를 재배해왔다. 2000년 이상 둑을 쌓고 산으로 올라가다 보니 가장 높은 논은 맨 아래보다 무려 1000m 이상 높은 곳에 있다. 산 중턱에 안개가 낀 날이 많다 보니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처럼 보일 법도 하다.

원주민들이 땀으로 만든 계단식 논의 둑과 계단의 비밀은 놀랍다. 이들은 산비탈에 차곡차곡 돌을 쌓아 둑을 만들었는데 오로지 선조들의 가르침과 경험만으로 만들었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만든 계단식 논의 제방과 계단은 2000년이 흘러도 견고하다는 거다. 필리핀 정부가 이들을 도와준다고 나섰다. 지형이 가파르다 보니 정부는 시멘트와 철근으로 튼튼하게 만들어줬다. 그런데 정부가 만든 제방과 계단은 몇십 년만 되면 다 무너져 버렸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이곳의 기후와 지형을 고려한 원주민의 지혜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만들어준 제방은 비가 오면 무너지고 물도 잘 가둬주지 못해요.”

필리핀과 비슷한 사례가 인도에도 있다. 인도의 북쪽 라자스탄주 지역은 가뭄이 자주 든다. 물을 가두는 제방은 이들의 생존에 매우 중요하다. 원주민들은 비탈에 쌓은 초승달 모양의 오목한 제방을 만들었다. 오랫동안 전해져온 선조들의 경험과 직관으로 돌, 모래, 석회암과 진흙을 이용했다. 이 제방 덕에 1000년간 지하수가 마르지 않았다. 대가뭄이 들어도 충분하게 농사짓고 살아왔다. 그런데 말이다. 20세기 들어 인도 정부에서 신기술로 제방을 만들어 줬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때부터 물 부족으로 고통받기 시작한 것이다. 정부에서 만든 제방은 비가 많이 오면 무너지고 평시에도 물을 잘 보존하지 못했다. 과학자들이 동원돼 원인을 찾아냈다. 원주민이 만든 제방은 단순히 물만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지하수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가뭄이 몇 년 계속돼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 비밀은 기후와 지형과 선조들 지혜의 결합이었다.

“유럽식 선진 과학농법보다 미개한 재래식이 더 낫다.” 1930년대 미지에 싸여 있던 뉴기니에 유럽의 농업학자들이 들어갔다. 이곳에 도착한 유럽의 농업 전문가는 경사를 따라 수직으로 이어 만든 고구마 밭의 배수구 도랑을 보고 경악했다. 유럽의 선진 과학적 영농법으로는 말도 안 되는 방식이었다. 이들은 유럽식대로 등고선을 따라 수평적인 배수구 도랑을 만들도록 했다. 그런데 이변(?)이 생겼다. 고랑에 물이 차는가 하면, 폭우가 내리자 산사태로 밭 전체가 휩쓸려 가고 말았다. 이 지역은 연 강수량이 1만 mm에 이르고, 지진과 산사태가 자주 발생한다. 유럽식 영농 기술 적용이 이곳에서는 재앙과 마찬가지였다. 유럽의 농경학자들은 자기들이 실패한 이유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원주민의 방법이 이곳 기후에 가장 적합한 방법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디지털이나 인공지능이 우수하고 효율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날로그 방법이나 인간의 직관에는 힘이 있다. 특히 날씨 예보에서는 말이다. 아날로그 시대의 마지막 예보관(?)인 필자가 직관을 중시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반기성 케이웨더 예보센터장 한국기상협회 이사장
#인공지능#아날로그. 계단식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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