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6월 테니스 프랑스오픈 여자단식 결승전. ‘알프스 소녀’ 마르티나 힝기스(스위스·당시 19세)와 ‘여제’ 슈테피 그라프(독일·당시 30세)가 맞붙었다. 힝기스는 중반까지 경기를 주도했다. 1세트를 얻었고 2세트에서도 그라프의 서비스 게임을 따내 2-0으로 앞섰다. 자신의 서비스 게임만 지켜도 왕관을 쓸 수 있었다.
문제의 2세트 3번째 게임. 그라프의 공을 힝기스가 넘겼다. 그라프는 되받지 못했다. 육안으로는 공이 그라프 코트 끝에 살짝 걸친 듯했지만 판정은 아웃. 힝기스는 격렬히 항의했지만 심판진은 완고했다. 항의 도중 그라프 코트로 건너가 해당 공의 자국을 확인하는 반칙을 범해 벌점 1포인트만 더 잃었다.
경기 흐름이 확 바뀌었다. ‘멘붕’에 빠진 힝기스는 결국 졌다. 눈물범벅으로 시상대에 올라 “꼭 이 대회에서 우승하겠다. 그땐 내 편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불발됐다. 코카인 복용, 잦은 은퇴 번복, 이혼까지 겹친 그는 메이저 대회에서 다시 우승하지 못했다. 10대 때 무려 5개 메이저를 석권하며 또 다른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그라프, 세리나 윌리엄스가 될 수도 있었던 천재 소녀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힝기스의 몰락이 그 판정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 공의 궤적을 좇는 전자 판정 시스템 ‘호크아이’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단순히 한 선수의 억울함 해소가 아니라 불필요한 논란에 휩싸인 메이저 결승전의 권위가 훼손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연구 결과도 이를 입증한다. 2007년 윔블던 대회 판정을 일일이 분석한 미국 UC데이비스 연구진은 총 83건의 오심을 발견했다. 이 중 84%인 70건이 ‘아웃’ 선언 때 발생했다. 의도적 편파가 아니라면 ‘아웃 오심(실제 인을 아웃으로 판정)’과 ‘인 오심(실제 아웃을 인으로 판정)’은 비슷한 비율이어야 한다. 허나 절대다수 오심은 아웃 선언 때 이뤄졌다. 디지털 기술의 혜택을 입을 수 없었던 19년 전의 19세 소녀가 안스러운 이유다.
2018 러시아 월드컵의 비디오 보조심판 ‘VAR’ 논란이 한창이다. 축구 강국에만 유리한 판정, 판독 요청 주체가 감독 및 선수가 아닌 심판이란 점은 비판받아 마땅하고 개선도 시급하다. 하지만 호크아이, 펜싱 전자판정기, 야구나 배구의 비디오 판독에서 보듯 스포츠계의 디지털화 바람은 이미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다.
특히 스포츠의 최대 가치는 누가 뭐래도 공정함이다. ‘육체’와 ‘땀’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영역에 들어온 디지털이지만 인간의 오류를 줄여줄 가능성이 있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하지 않을까.
스포츠계뿐이랴. 갖가지 파동에 얼룩진 법조계, 과도한 규제를 남발하는 공무원, 자신의 이해관계를 ‘민의’라 주장하는 시민단체 등 소위 사회의 ‘심판’을 자처하며 공정의 가치를 훼손하는 세력들을 보노라면 속히 인공지능(AI) 판검사와 공무원을 도입해 달라는 국민청원이라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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