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사(甲士) 박타내(朴他乃)가 창을 가지고 나아가서 잘못 찌른 까닭에 호랑이에게 물려 거의 죽게 되었다. 도승지 신면에게 명하여 극진히 약으로 구호하도록 해 궁궐로 돌아왔으나, 이튿날 박타내가 죽었다.” ―세조실록 38권
한반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호랑이 사냥터였다. 원나라는 고려에 호랑이 전문 사냥꾼인 착호인(捉虎人)을 직접 보내 호랑이를 사냥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1237년 9명, 1277명 18명의 원나라 착호인이 고려에서 호랑이를 사냥했다. 그만큼 한반도에 호랑이가 많았다. 호랑이 관련 이야기도 많아, 육당 최남선은 우리나라를 호담국(虎談國)이라고 했다.
최상위 맹수 호랑이는 조선의 큰 걱정거리였다. 호랑이는 한양 도성 안에도 출몰했고, 마을 인근에 서식하며 사람을 물어 죽였다. ‘어우야담’을 남긴 유몽인은 호랑이를 통해 사회를 비판하는 내용의 ‘호정문(虎穽文)’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호환을 묘사했다. ‘호정문’ 내용처럼 행상이 지름길로 가다가, 초동이 나무하고 꼴을 베다가, 아낙이 나물을 캐다가, 농부가 밭을 갈고 김을 매다가 호랑이를 만나는 일은 수시로 일어났다.
조선 조정은 호환을 막기 위해 일찍부터 많은 정책을 시행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착호갑사(捉虎甲士)와 착호인이었다. 착호갑사는 말 그대로 호랑이 잡는 특수 부대였다. 착호갑사는 서울, 착호인은 지방에서 호환을 방비했다.
착호갑사는 1416년 임시 조직으로 편성됐다. 이후 호랑이 사냥 실력을 인정받으며 정식 부대가 됐다. 1421년 40명, 1425년에 80명, 1428년에 90명, 세조 때는 200명으로 크게 늘었다. 성종 때 완성한 법전 ‘경국대전’은 ‘착호갑사’ 수를 440명으로 명시했다. 착호갑사가 되려면 180보 밖에서 목궁을 한 발 이상 명중시켜야 했고 두 손에 각각 50근(30kg)을 들고 100보 이상을 한 번에 가야 했다.
착호갑사는 다른 부대와 마찬가지로 활과 창으로 무장했다. 차이가 있다면, 일반 부대는 휴대가 용이한 각궁을 썼으나, 착호갑사는 크고 무거운 목궁이나 쇠뇌를 썼다. 각궁은 휴대가 편했지만 목궁과 쇠뇌에 비해 살상력은 낮았다. 반면, 쇠뇌와 목궁은 무겁고 컸으나 강력한 대전(大箭)을 쏠 수 있어 호랑이 같은 덩치 큰 맹수를 상대하기에 알맞았다. ‘국조오례의서설’에 따르면 대전은 길이가 5척 7촌 5분, 현재 도량형으로 환산해 160∼170cm에 달했다. 착호갑사는 호랑이를 추적해 먼저 대전을 쐈다. 명중시켜 상처를 입힌 다음 다가가 창으로 급소를 찔렀다.
호랑이 가죽은 비싼 사치품이었다. 인조 때 호랑이 가죽 한 장은 베 40∼50필에 팔렸다. 연산군 때는 베 80필, 60여 년 뒤인 명종 때는 베 350∼400필로 가격이 폭등했다. 그러다가 인조 때에 이르면 다시 40∼50필로 하락했다. 1744년(영조 20년)에 간행한 ‘속대전’에서 면포 1필 가격은 2냥으로 책정되었다. 대짜 호랑이 가죽 한 장은 보통 100냥 정도였고 이는 서울의 초가집 한 채와 맞먹는 액수였다. 포상이 아무리 무거워도 목숨보다 더할 수 없다. 착호갑사는 나라의 안위를 지키고 백성을 돌본다는 사명감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사명감이야말로 착호갑사가 목숨을 걸고 호랑이와 마주했던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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