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난주 토요일 오전 11시40분 경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성북동 방향으로 가는데 삼청터널 수백m 앞부터 도로가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거의 막히는 일이 없던 길이기에 의아했다. 10여 분 넘게 걸려서 삼청터널을 빠져나와보니 삼청각으로 들어가는 차들이 길게 꼬리를 물고 있었다.
이틀 후 신문을 보다 이유를 알게 됐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딸의 결혼식이 삼청각에서 있었던 것이다. 과거 요정의 대명사였던 삼청각은 현재는 예식장 겸 한식당이다. 집권당 의원들과 국무총리 장관 등 고위직들이 대거 참석했다고 한다. 처음엔 ‘설마’하며 믿기 힘들었고, 잠시 후 추 대표 등 여권인사들이 주장하는 ‘진보 20년 집권론’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꿈이 실현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보 장기집권을 이루고 싶으면 보수의 장기집권 꿈이 어떻게 물거품이 됐는지를 봐야한다. 불과 2년 반 전만 해도 자유한국당의 전신(前身) 새누리당은 더불어민주당보다 지지율이 2배 가량 높았다. 2015년 12월 리얼미터의 차기 대선 주자 조사에서 문재인은 김무성에게 뒤졌다. 그후 민주당이 갑자기 대단한 성취를 해내서 보수가 추락한게 아니다. 2016년 봄 박근혜 발(發) 공천파동에 이어 최순실 사태로 보수진영은 초토화됐다.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당이 죽을 쑨다고 해서 민주당의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보수건 진보건 시대의 발전에 걸맞게 진화해야 한다. 즉 정반합(正反合) 과정처럼 ‘보수①→진보ⓐ→보수②→진보ⓑ’로 전개될때 합(合)의 위치에 잇는 보수②는 보수① 보다 진화된 새로운 보수여야 한다. 그러나 ②의 단계에 해당했던 이명박, 박근혜 정권은 ①, 즉 김영삼
정권 보다도 퇴행한 특질들을 보였다.
그 퇴행의 특질들을 요약하면 △최고 권력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목표를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법치·합법적 절차는 형식적으로만 준수하는 외피에 불과하다 △세상을 보는 눈이 수십년전에 멈춰있는 인물들을 자꾸 요직에 등용한다 △검찰 경찰 국세청 금융감독원 등 권력기관들이 정권의 사냥개 역할을 한다 △역사 교육 문화 등 국민의 생각과 감성의 영역에 정권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한다…등이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은 1987년 민주항쟁 이전의 집권세력과는 다른,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체화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성장을 펼치는 보수여야 했다. 당시 여권에는 YS 상도동계 출신을 비롯해 민주화에 기여한 인사들도 많았지만, 독재치하에서도 아무런 고민도 없이 승승장구했던 인사들로 다시 권력엘리트가 충원됐다.
그러면 진보ⓑ에 해당하는 문재인 정권은 과거에 비해 진화된 진보일까. 앞에 열거한 퇴행의 특질들 가운데 색깔만 달리한채 반복되는 것은 없을까. 13일 발표될 검찰 간부 인사를 앞두고 전 정부에서 기획·사정수사에 참여했던 검사들은 줄사표를 냈다. 새 정부 기획수사에 앞장선 인물들은 승승장구한다. 각 분야에서 낙하산도 반복된다. ‘미디어오늘’ 출신으로 국정홍보처 차장을 지낸 친노 인사가 한국관광공사 사장이 된 것은 압권이다.
진보진영의 인재풀에도 균형감각과 미래지향적 시야를 지닌 인재들이 많이 있을 텐데 한국 현대사를 친일파가 득세하고 민중이 탄압받아온 질곡의 역사로만 인식하는, 수십년전 독재 시절처럼 ‘선악(善惡) 이분법’으로 세상을 보는 인사들이 등용되고 있다. 성장과 분배의 두 가치를 고루 체화한 진보성향 경제전문가들도 많을 텐데 실물경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기업들이 글로벌경쟁에서 어떻게 고군분투하는지 전혀 모르는 이들이 각종 위원회 등에 들어가 완장을 찬다. 이런 방향으로 간다면 문재인 정권의 내리막은 경제에서 시작될 위험이 크다.
문재인 정권은 진화한 새로운 진보가 될 여건이 충분했다. 보수의 몰락으로 중도 진영의 수많은 인재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호조건이다. 그런데 좌 쪽에서도 극단에 있는 인물들이 등용된다. 자기들끼리의 끈 때문이다. 실세들의 사람 챙기기, 그리고 집권당 대표의 자녀 결혼식에서 보듯 특별히 긴장해서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는 것 같지도 않은 안이함…수평선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먹구름이다. 좌파든 우파든, 극단은 생명력이 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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