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쪽에 간 김에 묵고 오려고 하다가… 여행 중이기 때문에 문서로 정리하고, 글로 정리하고 할 시간이 없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달 1일 오후 2시 경기 성남시 자택 인근에서 연 기자회견 때 맨 처음 한 발언이다. 지난해 9월 퇴임 뒤 250여 일 동안 침묵을 지키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가라앉히기 위해 한 회견 서두에 ‘동해안… 여행’을 언급한 배경은 뭘까.
양 전 대법원장은 회견에서 “검찰서 수사한답니까?”라며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에 사실상 반대 의사를 나타냈지만, 김명수 대법원장의 ‘수사 적극 협조 방침’ 공개 이후 검찰 수사가 이어지고 있다. 법원 내부에는 양 전 대법원장의 회견이 여론을 악화시켜 검찰 수사를 부추겼다고 생각하는 판사들이 적지 않다.
그는 회견 이틀 전인 5월 30일 강원 고성군 건봉사에서 치러진 오현 스님 다비식(茶毘式)에 참석했다. 바로 회견 첫 발언의 ‘동해안… 여행’ 일정 중 일부였다.
다비식을 주관한 정휴 스님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양 전 대법원장이 오전 10시부터 1시간 가까이 진행된 영결식과 그 뒤 4시간 동안 이어진 다비식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정휴 스님은 “법조계 수장이던 양 전 대법원장은 오현 스님의 세속 상좌(제자) 중 한 명”이라고 했다. 오현 스님은 짧지만 울림 있는 화두를 자주 던졌던 선(禪) 시조의 대가다.
양 전 대법원장은 재직 중 오현 스님을 종종 언급했다. 대법원장 퇴임사 마지막 대목은 ‘고목 소리 들으려면’이라는 오현 스님의 시였다. ‘속은 으레껏 썩고/곧은 가지들은 다 부러져야/굽은 등걸에/매 맞은 자국들도 남아있어야.’ 사법헌정사(70년)의 3분의 2 가까운 42년간 판사로서 2, 3차 사법파동을 지켜본 자신을 ‘모진 풍상을 이겨낸 고목’에 비유한 것으로 해석된다.
2011년 9월 양 전 대법원장의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도 오현 스님이 거론됐다. 기독교 신자인 양 전 대법원장이 존경하는 인물은 오현 스님이고, 스님의 권유로 만해 한용운을 기리는 상의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일이 공개됐다. 당시 양 전 대법원장은 “(지방법원 부장판사 시절) 설악산에 등산을 여러 번 가면서 마침 백담사에 거처하고 계시던 스님과 이야기를 하던 중 워낙 넓으신 포용력과 인격에 감읍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양 전 대법원장이 회견에서 밝힌 대국민 메시지는 오현 스님의 울림이 큰, 짧지만 굵은 가르침에 크게 못 미쳤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하는 판사들이 많다.
오현 스님 다비식이 끝나고 이틀 뒤 오전 11시 양 전 대법원장은 ‘3시간 뒤 자택 앞에서 잠깐 입장 표명을 할 예정’이라는 문자를 기자단에 보냈다. 하지만 잠깐이 아니라 15분간의 입장 표명에 이어 질의응답에 15분이 더 걸리면서 논점이 흩어졌다. ‘양보할 수 없는 한계점’이라며 “재판 거래는 상상할 수 없고, 재판에 개입하지도 않았다”, “상고법원은 대법원이 제 기능을 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여론의 관심은 다른 발언에 집중됐다. 대표적인 게 “(대법원 진상조사단에) 꼭 내가 가야 합니까?”, “흡사 남의 일기장 보듯 완전히 뒤졌다”, “검찰서 수사한답니까?” 등이었다.
당시 회견을 지켜본 판사들은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법원 내부에선 “책임을 회피하고 아랫사람들에게 미루는 모습으로 비쳤다”는 반응이 나왔다.
양 전 대법원장은 시대가 공감할 만한 화두를 던진 오현 스님의 뒤를 따를 수 있을까. 그는 회견에서 “상황을 정리해 말씀을 드릴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부디 다음엔 많은 후배 판사들이 공감할 묵직한 메시지를 밝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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