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3월 만 85세 생일을 맞았던 그녀는 일주일에 두 번, 무릎을 땅바닥에 대지 않고 똑바른 자세로 20차례 팔굽혀펴기를 한다. 트레드밀(러닝머신)에 올라 5분간 가볍게 조깅을 하고, 꽤 무게가 나가는 추에 연결된 봉을 머리 위에서 아래로 끌어당기는 ‘풀다운’을 3세트(12회 1세트)나 한다. 체조용 고무공인 짐볼 위에 앉아 능숙하게 균형을 유지한 채 아령도 든다. 감탄을 연발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그는 “젊은 사람들도 쉽게 따라 하지 못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연방대법관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소수자 인권 증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아 진보진영의 영웅으로 통한다. 그는 대장암 투병 중이던 1999년부터 이 같은 ‘운동 루틴’을 지켜왔다. 남편(마틴 긴즈버그·2010년 작고)이 항암치료를 받는 자신을 보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막 나온 것 같다”고 걱정한 것이 운동 시작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러나 그는 2009년엔 췌장암으로 수술대에 올랐고, 2014년엔 막힌 심혈관을 넓히는 스텐트 시술을 받았다. 그럴수록 헬스장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더욱 분주해졌다. 워낙 건강 문제로 고생을 많이 하다 보니 “(20년 가까이 함께한 개인 트레이너는) 내 인생에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
헬스장으로 향하는 그녀의 눈빛은 이번 달 들어 결연하기조차 하다. ‘반드시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는 듯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주 보수성향의 브렛 캐버노 워싱턴 연방항소법원 판사(53)를 신임 대법관으로 지명하면서 대법원이 오른쪽(보수)으로 완전히 기울게 됐기 때문이다.
9명으로 구성된 대법원은 최근까지도 보수(4)-중도(1)-진보(4)의 팽팽한 균형을 유지해왔다. 지난달 말 퇴임한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82)이 기본적으로 보수성향임에도 소수자 인권과 관련해선 진보적 판단을 내리며 진보성향 동료들의 ‘깜짝 우군’으로 활동할 때도 많았다. 그래서 ‘중도’로 분류되곤 했다. 하지만 확실한 보수성향인 캐버노 판사가 상원 인준을 통과해 대법원에 입성하면 기존의 이념적 균형은 완전히 깨지게 된다. 더군다나 트럼프 대통령 임기 중 85세 고령의 긴즈버그마저 대법원을 떠난다면 ‘보수 6 대 진보 3’의 일방적 구도가 될 게 뻔하다.
진보성향의 유권자들은 긴즈버그를 향해 “채소 케일을 더 많이 드셔야 한다” “포장된 땅콩을 보내 드리겠다”는 식의 조언과 제안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그를 (영원히 죽지 않는) 뱀파이어로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말까지 나온다.
긴즈버그는 ‘보수의 쓰나미’를 막는 방파제를 자처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진보의 방파제를 약화시킨 데 있어서 그 역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다. 진보진영 일각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인 2011년경 당시 70대 후반이던 긴즈버그가 은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혹시라도 차기 대선(2016년)에서 공화당이 이기고 그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대법원을 떠나게 된다면 진보진영엔 치명타가 될 수 있다고 걱정했기 때문이다. 대법원에 ‘젊은 진보 피’를 미리 수혈해 둬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긴즈버그는 은퇴를 거부하고 자리를 지켰다. 미국 최초 여성 대통령의 따뜻한 인사를 받으며 대법원을 떠나는 아름다운 퇴장을 상상했던 것일까. 결과적으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에게 걸었던 그의 ‘정치적 도박’은 실패했다.
긴즈버그는 공개석상에선 “건강에 문제가 없다”며 쏟아지는 걱정에 손사래를 친다. 하지만 진보진영의 희망과 기대에 부응하는 길은 만만치 않다.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한다면 87세까지 건강을 유지하면 되지만, 재선에 성공하면 최소 91세까지 은퇴를 미뤄야 한다. 역대 최고령 연방대법관 기록(90세)을 넘어서야 한다.
그의 꼼꼼함은 정평이 나 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전 건네준 편지에 적힌 오자(誤字)를 그냥 넘기지 못하고 주석을 달아 오류가 있음을 표기했을 정도다. 긴즈버그는 은퇴 시기도 그런 치밀함과 꼼꼼함으로 저울질하고 있을 것이다. 대법원 내 헬스장에서는 그가 좋아하는 오페라 아리아가 자주 흘러나온다. 그 음악을 들으며 그의 숭고하고 간절한 팔굽혀펴기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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