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오성윤]SNS 활동을 그만둔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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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윤 잡지 에디터
오성윤 잡지 에디터
친구가 말하길, 1년 전쯤 붓과 벼루를 샀다고 했다. 그때부터 이따금 내키는 글자를 써보곤 한다고. 정확히는 ‘휘갈긴다’고 표현했으나 듣고 있으려니 꽤 정적인 감흥의 취미 같았다. 이를 테면 좋은 선 하나 그을 때마다 시간을 들여 흐뭇해하는 식이랄까. 언젠가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먹을 갈아 ‘눈 설(雪)’ 자만 몇 백 장을 썼다고도 했다.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날이었고 적잖이 취한 밤이었다. 눈 설 자의 받침변이 어느 방향으로 열렸는지도 얼른 확신치 못하는 나는 ‘으흠’ ‘그렇구나’ 따위의 설익은 대꾸만 늘어놓았으나 실은 꽤 감명 받은 터였다. 단순히 서예라는 취미나 겨울밤 일화에 서린 풍류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장 좋았던 건 그의 지인 누구도 이런 사정을 잘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꽤 영향력 있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가진 그가, 한번도 서예 관련 포스팅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어느 불문학자의 산문집에서 읽은 표현 하나가 한동안 혀끝에 맴돌았다. ‘내적 삶’. 문맥에서 그리 중요치 않은 표현이었고 백과사전에서 그 정의를 찾기 힘든 것으로 미루어 딱히 정립된 개념도 아닌 듯했다. 실은 그래서 더 좋기도 했다. 형태로 드러난 삶의 맞은편에도 삶이 있다는 사실을, 두 단어로 그리 태연히 전제한 것이니. 최근에 내가 지인들, 밥 먹을 때나 잠들 때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떼어놓지 못하는 이들을 염려하게 된 이유에도 그 표현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독백 형식 때문에 착시를 일으키곤 하지만 SNS는 지극히 사회적인 행위다. 자각하든 못 하든 타인을 대할 때 우리는 ‘페르소나(사회적 인격)’라는 가면을 쓰며, 모든 발화가 타임라인이라는 광장에 전시되는 시스템 아래에서는 제아무리 내밀한 기록도 ‘표방(標榜)’이 되기 때문이다. 오프라인 인맥을 기반으로 하는 종류의 SNS라면 두말할 것 없다. 현대의 정신분석학이 페르소나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으나 혼자가 됐을 때에도 그 가면을 벗지 못하는 상태를 위험으로 간주한다고 들었다. ‘내적 삶’이라는 게 잃을 수도 있는 성질의 삶이라는 뜻이다.

나는 소통과 성찰 중 어느 한쪽이 더 중요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직 스스로에게만 골몰하는 삶에 소통의 여지가 있을 턱이 없고, 잠시도 코드를 뽑아 놓지 못하는 삶에 성숙한 자아를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오늘날의 기술 발달이 후자의 경우로 흘러가기 쉽게 형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2년 전 일체의 SNS 활동을 그만둔 것도 그런 이유다. 수시로 연결된 세계 속에서, 내게는 자신만의 균형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만 읽을 글을 쓰지도 않고 홀로 춤을 추지도 않는다는 사람, 이유와 목적을 벗어난 자신만의 시간을 갖지 않는다는 사람이 어떻게 삶의 무게를 견디는지 알지 못한다. 일상의 면면을 전시하고 타인의 생활을 탐색하며 ‘마음’을 찍거나 기대하는 것도 일종의 유희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시적 이미지들 속에서 은연중에 치우친 삶의 기준을 세우게 될 때, 스스로의 일거수일투족을 객관적 시선으로 감시하게 될 때, 그걸 더 이상 놀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터이다. 노동이라면 모를까.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잠시도 그칠 수 없는, 아주 고단한 종류의 노동 말이다.
 
오성윤 잡지 에디터
#sns#내적 삶#페르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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