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학창 시절 도시락을 싸 들고 다니며 레슬링 선수로 뛰었다. 그 때문인지 레슬링을 비롯한 비인기 종목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올림픽이나 아시아경기를 앞두고 이 회장은 곧잘 서울 태릉선수촌을 찾았다.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선수들을 만나 격려하고 두둑한 훈련 지원금을 내놓았다.
1982년부터 1997년까지는 대한레슬링협회장도 맡았다. 회장사를 그만둔 후에도 레슬링에 대한 지원은 이어갔다. 약 30년간 레슬링에 쓴 돈만 300억 원 가까이 된다.
삼성은 2012년을 마지막으로 레슬링협회 후원을 중단했다. “협회 내부 갈등과 파벌이 심각해 예산의 투명성 제고가 전혀 안 된다”는 게 이유였다. 삼성은 삼성생명 레슬링 팀을 운영하고 있을 뿐 협회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협회 운영비가 예전의 3분의 1도 안 되게 쪼그라들면서 국가대표 전지훈련이 크게 줄었다. 랭킹 포인트를 쌓을 수 있는 국제대회에 나가는 것도 여의치 않다.
이번 주 삼성은 또 하나의 종목과 인연을 끊는다. 1997년부터 21년간 후원해온 대한빙상경기연맹이다. 삼성생명 출신 김상항 회장이 지난달 물러난 데 이어 이번 주엔 연맹에 파견 나와 있던 삼성 직원들도 모두 돌아간다. 삼성은 그동안 220억 원을 투자해 한국을 겨울 스포츠 강국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삼성은 그동안 한국 스포츠의 최대 후원자였다. 프로야구, 프로축구, 프로배구, 프로농구 등 4대 프로스포츠에서 팀을 운영해 오고 있고, 골프에서도 박세리 등을 후원했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로 체육계가 흔들렸을 때도 스포츠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창때 삼성은 육상과 빙상, 레슬링, 탁구, 승마, 배드민턴, 태권도 등 모두 7개 종목의 회장사를 맡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스포츠에서 점점 발을 빼는 모양새다. 몇 해 전 20년 넘게 운영해 왔던 테니스단과 럭비단을 해체했다. ‘무조건 1등’을 외쳤던 프로스포츠에서도 특유의 야성을 잃어버렸다. 공격적인 투자로 최고의 선수들을 싹쓸이했던 건 모두 옛날 일이다. 야구는 몇 년째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삼성은 아마추어 종목 가운데 양대 기초 종목인 육상과 빙상 두 종목에 대해서만은 꾸준히 후원을 이어왔다. 하지만 이제 빙상에서 손을 떼면서 남은 것은 육상 하나뿐이다.
모든 분야가 그렇듯 스포츠도 투자 없이 결실을 맺기 힘들다. 삼성과의 이별은 한국 스포츠로서는 큰 악재다. 예전 같았으면 내달 열리는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를 앞두고 삼성을 비롯한 많은 기업인들이 선수촌을 찾아 격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충북 진천선수촌은 찾는 이 없이 조용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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