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구명보트를 타고 바다에 표류 중이다. 보트엔 50명이 있는데 10명을 더 태울 수 있다. 보트 밖에서 100명이 허우적거리며 구조를 애원한다. 보트에 있는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세 가지 선택이 가능하다. ①가급적 모두 구조한다. ②10명만 구조한다. ③모두 외면한다. 대개는 ①과 ②를 택할 것이다. 하지만 1985년 이 ‘구명보트 윤리’를 제시한 미국의 생태학자 개릿 하딘은 ③이 정답이라고 했다. 60명 정원인 보트에 150명이 타면 다 죽는다. 10명을 골라 태우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만약을 대비해 여유분이 필요한 데다, 100명 중 10명을 어떻게 추리나. 훌륭한 사람? 절박한 사람? 아니면 선착순? 하딘은 구명보트 비유를 통해 “완벽한 정의는 완벽한 파국을 낳는다”며 인구 과잉에 따른 환경 파괴를 막으려면 후진국을 도와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가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구명보트 윤리를 이용해 제주 예멘 난민 사태로 달아오른 난민 논쟁을 풀어보자. 먼저 위기에 처한 난민을 최대한 수용하는 게 인간의 도리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한국은 1992년 난민협약에 가입했고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2012년 난민법을 제정한 난민 보호 선진국이다. 하지만 올해 6월까지 난민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849명, 난민 인정률이 4%다. 미국 독일 영국 캐나다 등은 25∼45%다. 한국에만 가짜 난민들이 몰려오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인정률이 최소한 두 자릿수는 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대로 난민 심사 절차를 강화하거나 난민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가뜩이나 취직이 안 되고 ‘송파 세 모녀’들도 많은데 난민들에게 일자리 뺏기고 복지 혜택 주고 범죄와 테러의 위협에까지 시달리다간 우리까지 죽는다는 논리다. 특히 20대와 여성들의 난민 반대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데 그만큼 일자리와 안전 문제에 대한 공포감이 크기 때문이다.
사람이 먼저인가, 국민이 먼저인가. 대부분의 딜레마가 그러하듯 난민 딜레마도 양극단 사이에 답이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용(golden mean)’이다. 예를 들어 ‘만용’과 ‘비겁’의 양극단 사이에 ‘용기’가 자리한다. 그런데 중용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건 용기, 그냥 지나치는 건 비겁이다. 하지만 수영은 못하고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이 물에 뛰어드는 건 만용이다. 그렇다고 외면하는 건 비겁이며 구조를 요청하러 달려가는 것이 용기다.
‘한국호’를 타고 항해하는 우리를 향해 가난과 전쟁과 정치적 박해를 피해 도망 왔다며 손을 흔드는 이방인들이 있다.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 그들을 외면하는 건 비겁한 거다. 이제 와서 난민법을 폐지하고 난민협약에서 탈퇴하며 뒷걸음질을 칠 수는 없다. 난민협약에 가입한 140여 개국 가운데 탈퇴한 나라는 없다. 그렇다고 능력 밖으로 수용하는 건 만용이다. 일손이 부족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둔 일본도 난민 인정률은 0.2%밖에 안 된다. 그 대신 지원금을 많이 낸다(2017년 유엔난민기구 국가별 기부금 순위 4위).
한국갤럽이 최근 성인 남녀 1002명을 대상으로 제주도 예멘 난민 신청자에 대해 물었는데 ‘가능한 한 수용’(11%)하거나 ‘최소한으로 수용’(62%)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난민법 폐지 국민청원에 대한 정부의 답변 시한이 8월 13일이다. ‘비겁’도 ‘만용’도 아닌 ‘용기’ 있는 답을 내놓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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