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광표]효자 태풍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27일 03시 00분


최악의 폭염이 찾아왔던 1994년 여름, 폭염의 기세를 다소 누그러뜨린 것은 태풍이었다. 그해 7월 26일, 한반도에 상륙한 7호 태풍 ‘월트’는 부산 경남북 지역에 피해 없이 100mm 안팎의 비만 뿌리고 빠져나갔다. 당시 동아일보는 ‘태풍에 감사장을… 단비 환호’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7월 24일 38.4도였던 서울의 기온이 태풍 덕분에 26일 27.9도로 떨어졌다.


▷올여름 한반도가 살인적인 열돔(Heat Dome)에 갇혔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유라시아 대륙이 뜨겁게 가열되면서 고온 건조한 공기가 한반도 부근으로 확장했고 이런 상황에서 덥고 습한 북태평양 고기압까지 한반도에 영향을 줘 폭염이 계속되고 있다. 편서풍이 불면 동쪽으로 이동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번 고기압은 너무 강력해 미동도 하지 않는 ‘슈퍼 고기압’이다.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면 우리만이 아니라 지구 북반부 전역에서 열돔 현상을 겪는다는 점일 게다. 최근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팀은 뜨거운 기온과 자살률을 분석해 평소보다 1도가 높은 달에는 자살률이 미국에서 0.68%, 멕시코에선 2.1% 높아진다고 밝혔다. 트위터 메시지 6억 개를 분석했더니 날이 뜨거워지면 ‘혼자’ ‘외로운’ ‘갇힌’ 같은 단어 사용이 증가한다는 것도 알아냈다. 못 견디게 더운 날씨가 짜증과 폭력성을 키운다는 연구 결과도 적지 않다. 저명 학술지까지 찾아보지 않더라도 우리가 요즘 현실에서 절감하는 바다.

▷12호 태풍 ‘종다리’가 한반도로 다가온다는 소식이다. 소형 태풍이어서 북태평양 고기압의 위세를 뚫기엔 일단 역부족이란 전망이 나온다. 기상청은 “종다리가 29일 일본 본토를 관통하고 30일 오전 동해상으로 이동해 독도 동쪽 약 350km 해상에서 소멸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동해안까지 좀 더 접근한 뒤 소멸한다면 온대성 저기압의 영향으로 다음 주 초 전국에 비가 내릴 가능성도 있다. 비는 아니더라도 한반도를 감싸고 있는 열돔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기대도 나온다. 물론 종다리가 영향을 미치지 못한 채 소멸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효자 태풍’이 간절해지는 여름이다.
 
이광표 논설위원 kplee@donga.com
#폭염#태풍#열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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