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인색한 정부, “스미마센” 국민… 야누스를 닮은 듯한 이웃나라
속내 숨기는 日, 쉽게 드러내는 韓… 역사미화 일드, 역사비하 한드
‘서로 다르다’ 인정, 선린의 첫걸음
심야의 도쿄 도심에서 예약한 민박집 숙소를 찾지 못한 서양인 둘이 좌충우돌 끝에 어느 아파트의 우편함에 든 열쇠를 보고는 그 집에 들어간다. 현관을 열려는데 안에서 문이 활짝 열린다. 잠옷 차림의 모녀가 놀란 표정으로 서 있다. 그런데 소리치지도 경찰을 부르지도 않는다. 그로부터 20여 분간 이방인들과 손짓발짓 숙소 찾기에 골몰한다. 별수 없이 문을 나서는 불청객들을 향해 모녀는 “스미마센(미안합니다)” 인사한다.
일본인의 일상에 깊숙이 스며든 ‘사과의 문화’를 소개하는 BBC 웹사이트의 최근 글이다. 이 기사는 일본인의 사과를 ‘이웃과 잘 지내기 위한 방법이자 이웃에 대한 존중’으로 풀이했다. 국가 차원에서 과거의 가해행위에 관해 피해자로부터의 사과 요구를 외면하는 일본의 이미지가 각인된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는 어떻게 그런 양면적 조합이 가능한지 좀체 납득이 안 간다.
러시아 월드컵 16강전에서 3-2 역전패를 당한 일본 축구 대표팀이 쓰라린 마음으로 경기장을 떠나면서 라커룸을 말끔히 청소하고 감사메모를 남긴 사진도 기억난다. 일견 사소해 보이는 뒷마무리까지 경우 바르게 처신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 그러면서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우기는 청소년 교육을 3년 앞당겨 내년부터 실시하겠다는 일본 정부. 야누스라 할까, 한 얼굴에 담긴 모순적인 두 표정이라 할까.
일본 드라마에서도 우리 정서로는 수용하기 힘든 장면이 종종 나온다. 형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와 결혼하는 동생 등 한국과 다른 차원의 막장 스토리가 덤덤하게 전개된다. 더 놀랍고 신기하게 비치는 것은 역사적 인물을 다루는 방식이다. 한 판타지 역사물에서는 ‘울지 않는 소쩍새는 죽여버린다’는 오다 노부나가의 난폭한 성품과 학살 방화 등 무고한 평민들의 희생을 부른 잔혹한 통치행위가 인간적 고뇌와 강한 추진력으로 포장돼 있다. 오다는 존경받는 영웅이니 그렇다 쳐도 그와 대립한 세력에도 개별적 정황과 의미 부여를 하는 식이다. 그리하여 드라마 속에서 역사는 또 한번 미화된다.
최소한 드라마만으로 본다면, 일본과 반대로 한국은 역사 비하에 익숙한 듯하다. 하반기 화제작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미스터 션샤인’. 190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한 이 시대극은 방영 직후 극중 인물과 스토리라인을 둘러싼 역사 왜곡 및 식민사관 논란에 휘말렸다. 일본의 침탈을 정당화하는 듯한 드라마 설정이란 비판이다. 친일파로 등장하는 악역의 입장을 ‘그럴 만도 하겠다’ 싶게 합리화한 반면 지배계급은 무능과 탐욕의 화신으로 그려졌다는 것. 청와대에 강력 조치를 청원한 탓인지 결국 제작진이 “혼란을 사과드린다”며 일부 내용을 수정하기에 이르렀다.
오락물인 드라마를 놓고 정색하여 바쁜 청와대에 청원하는 것도 어리둥절하지만, 아무리 흘러간 역사라고 오늘의 관점에서 제 맘대로 재구성하는 드라마나 영화의 전개 방식도 마뜩지는 않다. 십중팔구, 나라 위한 충정과 악의 세력의 대립이란 이분법적 접근에 매달린다. 외세와 관련된 내용이면 어김없이 ‘못난 조상, 못된 일본’의 공식을 탈피하지 못한다. 자국 역사에 대한 평가에서 일본은 터무니없다 할 만큼 후한 반면, 우리는 야박하기 짝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뽕’만큼 자학도 위험하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므로.
일본은 과거사뿐 아니라 현재에도 비교적 관대한 것 같다. 지난달 기상청이 서일본 호우를 경고한 날 아베 신조 총리는 40여 명의 자민당 의원들과 술판을 벌였다. 결국 기록적 폭우에 안이한 초기 대응이 맞물려 2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비판은 잠시, 아베의 3연임은 확실시된다. 여론이 아베의 편이다. 되살아난 경제가 그 이유다. 만약 이 땅에서였다면 어떠했을까.
일본은 가장 가까운 나라라곤 하지만 어찌 보면 서양만큼이나 다른 나라이다. 따라서 한일의 국민성과 의식구조가 얼마나 다른지 제대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 양국의 건설적 관계를 위해 필수적일 터다. 특히 지도자라면 감정적 대응을 해선 안 되겠다. 으레 일본에만큼은 강하게 밀고나가야 박수를 받는다는 해묵은 공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내수시장을 겨냥한 정략적 분노 마케팅이 아니라 국가대계를 위한 사심 없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100년 너머 그 옛날에도 이런 이야기가 넘쳤을 것이다. ‘미스터 션샤인’을 보면 그래서 안타깝다. 광복절이 다가오는 지금이 더욱 덥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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