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말 일본 도쿄 신주쿠역 앞에서는 이례적인 집회가 열렸다. 여성들이 주체가 돼 성추행 성폭력을 추방하자는 내용이었다. 특히 권력 핵심 부서인 재무성의 후쿠다 준이치(福田淳一) 전 사무차관이 여기자에게 “가슴을 만져도 되냐”는 등의 성희롱 발언을 상습적으로 한 사실을 강하게 규탄했다. 여기에 그를 두둔한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 겸 재무상에 대한 분노도 표출됐다.
중학생부터 흰머리 할머니까지 다양한 세대의 여성 100여 명이 모인 집회의 공식 구호는 ‘나는 침묵하지 않아(私は默らない)’. “왜 우리만 당해야 하나”라는 성토가 2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한 중년 참가자는 “불이익을 당해도 여자니까 참고 살아왔는데 세상이 바뀌었다. 일본 사회도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들은 3일 또 집회를 열었다. 구호는 ‘침묵하지 않아’에서 ‘화내도 좋다(怒っていい)’로 한층 강해졌다. 이들이 모인 장소는 신주쿠구의 도쿄의대 정문 앞.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 사립 의대인 도쿄의대가 12년 전부터 입시에서 여성 수험생들의 점수를 일률적으로 깎아 남녀 입학자의 비율을 조절해 온 것이 드러났다.
요미우리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올해 입시 응시자 2614명의 비율은 남자 61%, 여자 39%인데 1, 2차 시험을 거친 최종 합격자의 성비는 남자 82%, 여자 18%였다. 알고 보니 논문 평가인 2차 시험에서 여성이면 무조건 점수를 20% 깎아 성비를 대학 측에서 고의로 조작한 것이다. “남자가 병원을 이끌어야 한다. 여성은 출산이나 육아 등의 이유로 (병원을) 떠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 대학 측의 설명이다.
아사히신문은 “출산과 육아를 양립하는 사람도 있는데 ‘여성=일을 쉽게 그만두는 사람’이라고 대학이 판단해 버리면 안 된다”고 비판했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도 “대학이 이런 비리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다른 대학까지 전수조사를 하겠다”고 말했다.
일본의 남성 우위 문화는 뿌리 깊다. 올해 초 스모 경기가 벌어지는 판(도효·土俵) 위에서 행사 관련 공무원이 쓰러졌다. 관중석에 있던 여성 두 명이 뛰어나가 응급조치를 하려 하자 “여자는 도효에 올라갈 수 없다”는 장내 방송이 나와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추진하는 ‘여성이 빛나는 사회’(여성이 살기 좋은 사회를 위해 취업 출산 등을 장려하는 정책)가 아직은 허울뿐이란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도쿄의대의 여성 차별 사태와 관련해 현역 여의사 103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약 65%가 이번 사태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는 점이다. 쓰시마 루리코(對馬ルリ子) 일본여성의료인연합회 이사는 ‘체념’이라는 표현을 썼다. ‘(의사는) 24시간 전력투구를 해야 하는데 여성으로서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일본 누리꾼들은 “인원을 더 뽑거나 업무 방식을 개선해야지 왜 체념을 하냐”고 반발하고 있다.
맞다. 일본 여성들은 체념도, 포기도 해선 안 된다. 남성 위주의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제도와 문화에 대한 오랜 침묵을 깬 지도, 그 외침에 귀 닫는 사회에 분노를 표출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세상이 변할 때까지 더 외치고 더 화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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