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하정민]내겐 너무 가벼운 R.I.P(Rest In Peace)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16일 03시 00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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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상가(喪家)에서 내 설움에 곡(哭)한다’는 말이 있다. 어릴 적 집안 어른의 빈소에 가면 망자의 배우자와 자녀보다 훨씬 서럽게 통곡하는 이가 꼭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무척 의아했지만 왜 그러느냐고 물어볼 순 없었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알았다. 가족보다 더 오열하는 사람의 상당수는 망자와의 인연이나 애통함 때문이 아닌 자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내는 일종의 투사(投射)를 한다는 걸. 누가 봐도 더 슬플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펑펑 우는 일이 고인과 유가족을 얼마나 위하는 행동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런 행위가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던 시절이 있었다.

노회찬, 최인훈, 황현산 등 우리 사회에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떠났다. 황현산 평론가는 생전 소셜미디어로 활발히 대중과 소통해 그를 기리는 글이 유달리 많다. 고인과의 추억을 회고하거나 그의 저작물에 대한 칭송이 주를 이루지만 몇몇은 좀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얼핏 봐도 고인과 오프라인에서 큰 인연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눈물이 날 것 같아 선생님 책을 못 펴겠다’거나 ‘사진과 이름만 봐도 눈물이 나서 소셜미디어에 못 들어오겠다’고 한다. 그를 시대의 사표(師表) 혹은 유일한 큰어른으로도 치켜세운다. 하지만 고인의 동생 황정산 시인은 장례 후 ‘형을 국민 스승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는데 형은 이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권위나 개인숭배를 싫어했다’는 글을 남겼다.

한 인플루언서(소셜미디어 등에서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며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개인)는 ‘황현산 선생이 아버지와 한날한시에 돌아가신 것을 위안으로 삼는다’라고 썼다. 두 망자가 생전 어떤 인연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설사 있다 해도 본인이 상주로 정신없을 와중에 부친의 사망과 법적 타인의 죽음을 엮어 트윗을 날리는 행동이 많은 공감을 살까.

이에 대해 한 트위터리안은 ‘자기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사진 첨부해서 감성 팔고 있는 것 이해가 안 감. 거기에 황현산 선생 돌아가신 것까지 엮어서’라고 지적했다. 표현이 좀 거칠지만 상례 중 상주가 불특정 다수에게 소셜미디어로 부모의 죽음을 알리는 일이 아직 사회적으로 널리 통용되지 않는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물론 혈족만 절절한 추모와 애도를 할 자격이 있는 건 아니다. ‘개인 계정에 내가 쓰고 싶은 말을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반론도 타당하다. 하지만 공개 소셜미디어에 올린 유명인에 관한 글이 100% 개인 용도일 순 없다. 파급 효과를 몰랐을 리 없으니 내용에 대한 논쟁은 일정 부분 불가피하다.

하정민 디지털뉴스팀 차장
하정민 디지털뉴스팀 차장
이런저런 일들을 보면서 디지털 시대의 적절한 애도 방식이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빈소를 찾든 온라인 조문을 하든 핵심은 진정성이다. 황현산의 책 한 번 안 읽어 보고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쓰거나, 남들에게 ‘대체 무슨 인연이길래 저렇게까지…’란 느낌을 주는 과도한 감정 표현은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 과유불급과 중용의 미덕은 언제나 유효하다.

※R.I.P=Rest in Peace의 줄임말로 영미권에서 망자의 영면을 비는 표현. 한국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와 유사한 뜻이다.
 
하정민 디지털뉴스팀 차장 dew@donga.com
#조문#추모#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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