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3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한국인 남성이 여권을 도난당한 사건이 있었다. 오후 11시 30분경 리티이니 거리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막 재즈클럽을 벗어나 우버 차량을 기다리던 피해자는 말을 걸어오는 라틴계 남성과 실랑이하게 됐고, 차량에 탑승한 후에야 주머니 속 여권이 사라졌음을 인지했다. 사건에 대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영사관의 평은 ‘놀랍다’는 쪽이었다. “장소도 생소하고 수법도 들어본 적 없는 종류입니다. 월드컵을 틈타 들어온 외국인의 소행인 건지….” 반면 귀국 후 접한 사람들의 평은 좀 다른 축이었다고 한다. “어쩌다가?” “조심 좀 하지.” “그러고 다니다 사고 날 줄 알았다.” 그들 모두가 리티이니 거리가 어떤 곳인지도, 백야 기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이 어떤 분위기인지도 전혀 알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피해자가 언제나 속옷형 전대와 주머니칼을 챙겨 다니는 종류의 여행자라는 사실도.
눈치 챘겠지만 위 이야기는 내 경험이다. 내겐 여전히 여권이 없고, 신용카드 결제 알림이 울릴 때면 조마조마하다. 하지만 가장 큰 고충은 1980년대 부산 태생인 내가 가해자 중심적 사고에 과히 노출되며 자랐다는 것이다. 심지어 절도 사건을 두고 칠판에 커다랗게 ‘見物生心(견물생심)’이라 쓴 교사도 있었다. “훔칠 마음이 들게 만든 사람의 잘못”이라나. 물론 견물생심은 가해자를 면죄하고 피해자를 탓하는 사자성어가 아니다. 가해자에게 감정 이입하고 약자 혐오를 드러내는 이가 어쩌다 교사가 됐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런 교육 덕분에 나는 피해자의 입장에 처할 때 여전히 스스로를 탓하는 마음과 맞서 싸우게 된다. 늘 그게 가장 고되다.
나는 가이드북에 나오지 않는 범주로는 한 발짝도 들일 수 없는, 바 옆자리에 앉은 누구와도 친구가 되지 못하는, 품에 주머니칼을 품고도 해 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야 하는 여행을 상상할 수 없다. 안전을 명심해야겠으나 최우선 과제로 삼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런 ‘삶’을 어찌 상상할 수 있을까? 최근 나를 가장 절망케 한 것은 이국에서의 범죄 피해가 아니었다. 안희정 씨 사건의 1심 판결문이었다. 재판 과정은 “어쩌다가?” “조심 좀 하지”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러고 다녔어?”에서 몇 발짝 나아가지 못한 것이었고, ‘어째서 재판이 나의 행실을 따지는 심리가 됐는가’ 묻는 원고의 입장문은 외로운 것이었다.
피고인에게 응당 물어야 할 것들을 묻지 않고 피해자에게 묻지 말아야 할 것까지 물을 때, 피고인은 위력이 있으나 행사하지 않았다는 말과 피해자는 심부름한 담배를 문 밖에 두고 갔어야 했다는 말을 동시에 할 때, 온갖 단편적 사례로 피고인을 ‘소통하는 정치인’이라 치켜세우며 피해자의 행동 양상에 대한 전문심리위원의 의견은 일절 배제할 때, 그 주체는 철저히 가해자의 ―혹은 강자의― 시선을 빌렸다고 봐야 할 것이다. 판결문에 쓰인 ‘성적 자기결정권’은 가해자를 면죄하고 피해자를 탓하는 표현이 아니다. 가해자에게 따져 물어야 할 혐의의 단서다. 그런 걸 오해하는, 혹은 오용하곤 들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가 어쩌다 판사가 됐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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