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차별 운동’ 넘어 일상이 된 ‘미투’
“미투 당할라”라는 농반진반 우려는 언행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
만연해 있는 성차별 요소를 인정하고 타인과 여성을 낮춰보지 않는 노력이
‘미투 가해자’가 되지 않는 첫걸음
‘미투’란 본래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폭력 가해 폭로에서 시작된 성폭력, 특히 권력형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한 운동의 용어다.
그러나 요즈음은 미투라는 표현이 운동적 의미를 넘어 생활 전반에 점점 흔히 쓰이고 있는 것 같다. ‘성폭력 가해 지목자’보다는 ‘미투 가해자’ 같은 말이 온건하게 느껴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외국어라 덜 공격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신조어 특유의 유연성 때문에 정확히 무슨 문제를 어느 정도의 강도로 제기하고 있는지 모호해진다는 점도 있다.
“지금 그 말씀은 언어적 성폭력입니다”라는 말에는 정색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진심이 그대로 실려 있지만, “어휴, 그런 말씀 하시다가 미투 당해요”라고 하면 약간 애매해진다. 물론 당신이 이 말을 들은 적이 있다면, 그 말은 ‘당신은 지금 성희롱 발언을 했으니 지금부터라도 언행을 조심하시라’는 뜻이지 딱히 다른 좋은 의미는 없다.
여기서 한층 나아가, “이러다가 나 미투 당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농담처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들려온다. “내가 방금 한 말은 성추행이다”라는 말은 어지간한 상식인이라면 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미투 당하는 것 아니냐”는 말은 아마도 ‘내가 어떤 문제적 발언을 한 것 같은데 정확히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고 나도 일단 문제가 있다고 느끼기는 했으니 넘어가자’는 정도의 신호인 것 같다.
애당초 문제 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그렇지만 무엇을 조심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분들도 있다. 요새는 무슨 말을 못 하겠다며 걱정하는 분들도 만난다. 그래서 유의사항을 정리해 보았다. 만약 당신이 연장자이고 모임의 식사 메뉴 결정권 정도라도 갖고 있다면, 혹은 성별에 한하는 문제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이성 간이라면 아래 세 가지를 염두에 두면 좋을 것이다.
첫째, 당신의 농담은 재미가 없다.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은 상당한 고급 기술이다. 오락과 예기(藝技)는 역사적으로도 전문가의 영역이었다. 더욱이 세대와 성별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는 애당초 즐거움이라는 감정을 공유할 기반 자체가 넓지 않다. 당신의 말을 들은 사람이 웃었다면, 당신의 말이 재미있었을 가능성보다 청자가 예의 바른 사람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아니면 당신을 아주 좋아하거나(사랑하는 가족 정도에만 해당하는 소리다). 이 현실을 인정하고 농담을 덜 하는 편이 안전하다. 농담도 못 하냐고? 단언컨대, 재미없는 농담을 하는 사람보다는 농담을 하지 않는 사람이 낫다. 본인에게만 재미있는 농담은 농담이라고 보기 어렵고, 상당히 많은 농담이 성차별적이다.
둘째, 반말은 친근함의 표시가 아니다. 나는 얼마 전에도 강남의 어느 특급호텔 라운지에서 직원에게 반말로 수작을 거는 어르신을 보았다. 서비스업 종사자는 당신과 친하지 않다. 길에서 만난 젊은이는 당신과 친하지 않다. 택시에 탄 승객은 당신과 친하지 않다.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학생은 당신과 친하지 않다. 이 모든 사람은 당신과 대등한 타인이다. 당신이 당신에게 반말을 할 수 없는 사람, 초면인 사람, 당신의 허락을 구해야 하는 사람에게 먼저 다짜고짜 반말만 하지 않아도 관계가 개선될 것이고, 반말을 했을 경우보다 훨씬 더 원만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아가씨’는 정확한 호칭이 아니다. 이 표현은 대부분의 경우 더 정확한 표현으로 대체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매장의 점원에게는 점원이라고 하면 된다. 왜 아가씨나 학생이라고 하나. 손님에게는 손님이라고 하면 된다. 나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는 사람에게는 선생님이라고 하면 된다. 도저히 이 모든 말이 입에 붙지 않는다면 차라리 ‘저기요’가 낫다. 잘 모르는 사이라면 연령과 성별로 어림짐작한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다.
우리 사회는 미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한쪽이 억지로 웃지 않는 건강한 관계는, 경험해 보면 꽤 멋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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