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따서 그 시대를 지칭하기도 하죠. 통치자의 이름을 그대로 옮겨 나폴레옹 시대, 빅토리아 시대, 에드워드 시대라고 합니다.
패션에서는 그 시대 패션 리더로서 유행을 주도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곧 스타일을 의미합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중세 암흑시대에 감춰져 있던 아름다운 인체를 드러내는 패션이 등장합니다. 여성의 경우 가슴골이 보일 정도로 네크라인을 깊게 파고, 코르셋으로 허리를 졸라매고 치마 부분을 크게 부풀려 근현대 드레스의 원형을 만들었습니다. 이를 널리 알리고 전파한 사람이 바로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었고 이를 ‘엘리자베스 스타일’이라고 부릅니다. 이 스타일은 후에 로코코 시대의 문화예술 애호가이자 연극배우 겸 제작자, 시대의 유행을 선도한 패션 리더인 마담 퐁파두르의 이름을 따서 ‘퐁파두르 스타일’로 발전합니다.
현대에 와서 패션 리더는 여왕이나 귀족이 아니라 대중이 사랑하는 스타로 바뀝니다. 영화의 파급력을 타고 스타가 보여주는 패션 스타일은 세계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기존의 글래머러스한 여배우들과는 확연히 다른 오드리 헵번의 등장은 곧 새로운 패션 스타일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 입었던 짧은 7분 팬츠, 슬림하고 심플한 블랙 드레스 등은 그녀의 이름을 따서 지금까지도 ‘헵번 스타일’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헵번의 뒤에는 패션디자이너 지방시가 있었습니다. 20세기 들어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의상실을 열면서 디자이너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초창기 메종(maison)이라는 조그마한 의상실이 브랜드로 성장하면서 디자이너의 이름은 곧 브랜드가 되었죠. 샤넬, 디오르, 발망 그리고 이브 생로랑과 지방시. 모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브랜드들입니다. 현재 브랜드의 거의 80∼90%가 사람 이름입니다.
기념비적인 패션 아이템에 사람의 이름이 붙는 경우도 있답니다. 1984년 에르메스의 경영자였던 장루이 뒤마 회장이 우연히 영국의 여배우 제인 버킨과 비행기에서 만났습니다. 버킨이 실수로 가방에 든 물건들을 쏟았습니다. 뒤마 회장이 “여배우 가방이 뭐 그리 지저분하냐”고 농담 섞인 핀잔을 주자, 버킨은 “예쁘기만 한 가방보다는 주머니가 있고 잠금장치가 튼튼한 실용적인 가방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답합니다. 뒤마 회장은 버킨에게 실용적인 가방을 직접 디자인해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죠. 우연성과 필요성이 만들어낸 이 가방은 그녀의 이름을 따서 ‘버킨백’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옷이건 가방이건 멋져야 하고 쓸모도 있어야 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 많은 패션 상품 중 아직까지도 사랑받고, 사고 싶어서 안달이 나게 하는 것은 이름을 걸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했던 제품들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이 시구처럼 패션에 이름을 붙였을 때 비로소 그 패션이 독특한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패션도 사람이 먼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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