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일의 갯마을 탐구]〈10〉해녀 잠수복이 불러온 태풍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31일 03시 00분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촌스럽고 오래된 간판이 걸린 2층 계단을 오르자 역한 냄새가 짙어졌다. 문을 여는 순간 접착제와 고무 냄새가 밀려왔다. 바닥과 테이블에는 검정 고무원단이 널려 있고, 그 속에서 노인 3명이 원단을 자르고 붙이고 있었다. 잠수복을 만드는 가내수공업 현장이다.

해왕잠수복사와 울산잠수복사는 동해안 해녀들의 잠수복을 책임지고 있다. 한때 호황을 누리던 수많은 해녀 잠수복 제작사들은 폐업했고, 동해안에 단 두 곳만 남았다. 둘 다 가족이 운영하는 영세업체다. 3명이 협업해 하루 잠수복 3벌을 만든다. 모든 과정이 수공업이다. 단골 해녀 수백 명 각각에게 꼭 맞는 잠수복을 만들기 위해서는 손의 수고로움에 기댈 수밖에 없다.

두 업체는 친자매가 운영한다. 언니가 해왕잠수복사를, 동생이 울산잠수복사를 운영한다. 40여 년을 경쟁하는 관계다. 해녀들은 전화로 잠수복을 주문한다. “작년보다 배가 좀 나왔으니 조금 늘려주시오.” 그러면 장인은 해녀의 치수를 꼼꼼히 기록한 양식지를 바탕으로 조정해서 제작한다. 이 양식지는 버리지 않고 보관했다가 다음 주문이 있을 때 사용한다. 동해안 모든 해녀의 신체 치수는 두 잠수복사가 보관하고 있다. 세월의 흐름에 따른 해녀들의 치수 변화까지 알 수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해녀들의 신체가 커졌다고 한다. 1970년대는 3호에서 4.5호까지를 주로 만들었으나, 지금은 5호에서 7호가 대세란다.

고무 잠수복 역사는 50년을 넘지 않는다. 고무 잠수복의 보급은 해녀에게 혁명이었다. 1960년대 후반, 일본에 있는 친지가 보내주거나 일본으로 원정 물질 갔던 해녀들이 가지고 오면서부터 알려졌다. 이렇게 되자 해산물 채취량이 몇 배로 증가했다. 고무 잠수복을 가진 해녀와 그렇지 못한 해녀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잠수복을 구입할 수 없는 다수의 제주 해녀들은 고무 잠수복 착용 금지를 결의했다. 워낙 고가여서 소수의 해녀들만 착용할 수 있었기에 발생한 갈등이다. 제주도에서 고무 잠수복 착용을 금지하는 마을이 늘어나자 육지에서는 더 빠르게 확산되었다. 동해안과 남해안 등지의 해녀 77% 정도가 입을 때, 제주도 해녀는 30% 정도만 착용할 만큼 차이가 났다.

고무 잠수복 이전에는 광목으로 만든 물옷을 입었다. 방한이 되지 않았고, 몸을 가리는 역할만 했다. 보온성이 없으니 물질 시간이 짧았고, 겨울에는 작업을 할 수 없었다. 반면 고무 잠수복은 보온성이 탁월해 바다에 오래 머물 수 있고, 부력이 좋아서 힘을 적게 들이고 떠 있을 수 있으며, 납 벨트를 착용해 더 깊이 잠수할 수 있었다. 탄성이 있어서 날카로운 바위에 부딪혀도 웬만해서는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명(明)이 있으면 암(暗)이 따르는 법. 효율성의 이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전에 없던 직업병이 나타났다. 무리한 작업으로 두통, 현기증, 난청, 축농증, 불안, 피부질환이 급증했다. 납 벨트 때문에 요통 환자가 급격히 늘었다. 항히스타민제, 진통제 같은 약물 오남용 부작용도 생겼다. 편리함이 가져다준 고무 잠수복은 장시간 노동과 각종 질병이란 근심거리를 동반했다. 문명의 이기가 늘 그러하듯이.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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