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 80년대 북한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가 아오지 탄광이었다. 1410년 경원병마사 곽승우가 경원부를 침입한 여진족과 싸우다가 아오지에서 매복에 걸려 부상을 입었다. 조선군은 포위되었지만, 꽤 분전을 해서 포위를 뚫고 탈출했다. 그러나 이 패전으로 경원의 주민이 공포에 질렸다. 조선은 경원부의 군사와 주민을 아오지로 옮기고 어떻게든 여기를 사수하려고 했지만 결국 경원을 포기하고 국경을 뒤로 물렸다. 20년 후 세종이 4군 6진을 개척하면서 비로소 이 지역을 되찾았다.
이 치욕적인 사건의 원인은 외교의 실패였다. 회령에 거주하던 먼터무는 과거 태조를 섬겼던 친한파 여진족이었다. 태종 때 명나라가 만주의 여진족에게 관직을 수여하는 등 적극적인 회유정책을 시작하면서 조선에 명과 먼터무 사이의 중재 역할을 요청했다. 조선은 명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먼터무에게는 명의 관직을 받지 말라고 부추겼다. 먼터무는 조선의 체면을 세워주는 척하다가 명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 베이징에 가서 영락제를 직접 알현했다. 상식적으로 먼터무가 명의 제안을 거부할 리가 없는데, 조선은 별다른 우대책도 제시하지 않다가 허를 찔렸다. 그러고는 분노했다. 1410년 호전적인 여진 부족이 경원을 습격해 병마사를 살해한 대사건이 벌어졌다. 조선은 이들을 토벌하면서 먼터무를 의심해 그의 일족을 살해했다. 조선은 먼터무가 먼저 배신했다고 하지만 진상은 확실치 않다. 먼터무는 조선에 등을 돌렸고 앞장서서 경원을 공격해 아오지 전투를 벌였고 조선을 몰아냈다.
외교는 첫째도 현실, 둘째도 현실이고, 항상 상대의 입장에서 판단해야 한다. 국제정세는 냉혹하고 철저하게 자국의 이해관계로 움직인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외교에 약한데, 이유는 늘 비슷하다. 상대를 쉽게 무시하고(그 용기만은 놀랍다) 우리 입장에서만 판단한다. 명분에 집착해서 이런 행동은 자주적, 이런 행동은 굴종적이라고 미리 공표하고 움직인다. 그러니 상대를 이길 수도 이용할 수도 없다. 어째 요즘도 전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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