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새소리가 들렸다.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 그는 구원이라도 받은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얘들아! 저 새소리 좀 들어보렴. 무슨 새일까?” 딸들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 말을 못 들은 척하고, 목발을 짚은 사람이 저만치 멀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엄마도 참 주책이셔. 새소린 무슨 새소리예요? 저 환자 목발에서 나는 소리였단 말예요.”
환자의 목발소리를 새소리로 착각한 사람은 소설가 박완서였다. 소록도 ‘관광’을 갔다가 발생한 어이없는 실수였다. 환자에게는 “쓰라린 소리”였을 목발소리를 작가는 새소리로 들었던 것이다. 부끄러웠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그는 자신을 충분히 깨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한센병이 낫는 병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완치된 환자에 대해 아무런 편견도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계몽할 작정”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랬으면 됐지 굳이 소록도 속의 그들을 보려 함은 무슨 심보인가.” 진짜 부끄러움은 여기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소록도 관광이 “남의 불행을 구색 갖춰 놓고 구경하려는 비정한 악취미이거나 천박한 호기심”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지 싶었다.
그는 그 실수를 통해 많은 것을 깨달았다. 그는 타인의 목소리를 열심히 귀담아들어야 하는 작가로서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타인의 고통을 알고 이해하는 능력을 과신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으면 고통과 상처의 목발소리를 아름다운 새소리로 듣는 실수는 또 일어날 것이었다. 작가는 이렇게 고백했다. “명색이 작가랍시고 열심히 귀담아들은 남의 목소리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어찌 소록도의 새소리뿐이었을까. 타인의 고통에 대해 참으로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두려운 오만은 없을 것 같다.” 새소리, 아니 목발소리는 이처럼 박완서에게 타인의 고통을 사유하게 만들고 겸손과 겸양의 덕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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