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12일 김명수 대법원장의 국회 인사청문회 첫날. 한 국회의원이 “후보자를 포함해서 대한민국 법관이 목숨 걸고 재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따지자 김 대법원장은 이렇게 답했다. ‘법관은 재판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이 명제는 고(故) 한기택 판사가 생전에 동료 법관들에게 자주 했던 말이다.
한 판사는 1988년 6월 정치성 강한 대법원 구성에 반대하는 ‘새로운 대법원 구성에 즈음한 우리들의 견해’라는 성명서 초안을 직접 쓰고, 서명용지 맨 위에 이름을 적었다. 전국 법관 400여 명이 동참하면서 김용철 당시 대법원장이 닷새 만에 사퇴했고, 제2차 사법파동이 시작됐다.
한 판사와의 오랜 인연도 인사청문회를 통해 공개됐다. “우리법연구회에 어떻게 가입하게 됐느냐”는 질문에 김 대법원장은 “1988년인가 아마 (우리법연구회가) 만들어졌을 텐데, 제가 그 모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다가 제 대학 동기인 한 판사를 통해 소개받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제2차 사법파동 몇 달 뒤 법원 내 진보 성향 판사와 판사 출신 변호사 등 10명으로 우리법연구회가 출범했다. 그러나 한 판사는 1994년에야 가입했다. 김 대법원장도 1997년 한 판사의 권유로 우리법연구회와 첫 인연을 맺었다. 2003년 한 판사가 우리법연구회 회장을 맡았는데, 그 후임이 김 대법원장이었다.
우리법연구회 회원이었던 현직 판사는 “김 대법원장 마음 깊숙이 ‘한기택 정신’이 있는 것 같다”고 둘의 관계를 설명했다. 한 판사와 김 대법원장 모두와 가까웠던 변호사도 “한 판사는 김 대법원장의 모델과 같다”고 했다.
기자는 2006년 한 판사 1주기 추모집인 ‘판사 한기택’을 제작하는 과정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 지인들은 한결같이 한 판사를 마흔 여섯으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언제나 ‘재판제일주의’를 지향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판사들에게 지상목표처럼 인식되던 고등법원 부장 승진이 판사를 관리자에게 예속시키고, 법관의 관료화가 심화되는 계기라고 한 판사는 비판했다. 김 대법원장은 최근 이 제도를 폐지했다.
김 대법원장은 취임 뒤 줄곧 ‘재판하는 판사를 위한 행정’을 중점 추진해왔다. 이는 곧 한 판사가 추구했던 사법행정의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 취임사에서도 “좋은 재판의 실현을 최우선 가치로 삼겠다”고 강조하는 등 ‘좋은 재판’이라는 말이 세 차례나 등장한다. 또 “이 흐름은 더딜 수는 있지만 결코 되돌릴 수 없다”고 강조했다. 김 대법원장은 요즘도 판사들에게 “반보씩 앞에서, 때론 반보씩 뒤에서 재판하는 판사들과 동행하겠다”고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추락하는 사법 신뢰를 회복할 복안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커지고 있는데, 개혁성과가 더디다는 불만도 나온다. 최근에는 “김 대법원장이 실패하면 자칫 한 판사 또는 그 세대 전체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들린다.
사법부 70주년(13일), 김 대법원장 취임 1주년(26일)을 즈음해 그동안 침묵해온 김 대법원장이 내놓을 메시지가 주목받고 있다. 한 판사는 재판에 목숨 걸었듯이, 잘못된 것을 고쳐야 할 때 침묵하지 않았으며, 사법정책 결정에 참여했을 때도 구성원의 목소리를 듣고 반영하느라 고군분투했다. 본질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맞섰던 ‘한기택 정신’에 더 충실하겠다는 단호함을 판사들이 지금 바라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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