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3월 나를 제외한 모두가 친구인 자리에 끼어서 저녁 식사를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깍두기’가 된 것도 서러운데, 심지어 나로 인해 테이블 전체가 정적에 휩싸인 순간까지 있었다. 전채요리로 아란치니(이탈리아식 튀김 요리)가 나왔을 때, 내가 그만 ‘설날’이라는 주제를 고안해 내고 만 것이다. “튀김이 워낙 번거로운 음식이잖아요. 혼자 살면 잘 안 해먹게 되죠. 그러다 이번 설에 차례 준비 돕는답시고 해보려니 영 어렵더라고요. 색깔도 제각각이고 튀김옷도 따로 놀고 말이죠.” 말이 끝났을 때 좌중은 이미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져 있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사려 깊은 누군가가 입을 떼긴 했다. “사실 저희 집은 차례를 지내지 않은 지 몇 년이 됐거든요. 그래서 차례 얘기만 나오면 민망해져요.”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동조했다. 그런데 결과가 놀라웠다. 알고 보니, 여태 차례를 지내는 게 그 자리에서 우리 집 하나라는 것 아닌가. 나는 깍두기이자 ‘홀아비’인 채로 5코스 디너를 견뎌야 했던 셈이다.
나는 명절 풍속을 좋아한다. 하지만 차례를 지내지 않는 이들에게도 합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래된 형식은 때때로 실체를 초월하는 바, 차례상은 마주할 때마다 그 실체가 의심스러워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최근 아름지기가 제사 문화를 주제로 기획한 전시 ‘가가례’에서도 그 힌트를 볼 수 있다. 전시 초입에 서두 격으로 퇴계 이황 종가의 불천위 제사상과 명재 윤증 종가의 제사상을 재현해 놓았는데, 둘 모두 근래에 비할 바 없이 간소하다.
이맘때쯤 온갖 매체에 단골 인터뷰이로 초빙되는 성균관의 논조도 늘 동일하다. ‘차례상에는 서너 가지만 올려도 충분하다’는 성균관 의례부장의 말은 언뜻 진보적으로 들리지만, 실은 그 편이 유교의 교리와 고증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제수의 항목은 전혀 정해진 바 없으며, 홍동백서, 조율이시 등의 규칙은 사실 그 근원을 알기 어려운 엉터리다.
하지만 내가 오늘날의 차례 문화를 문제시하는 것은 단순히 전통에 어긋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시대에 맞도록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례의 대중화, 축소된 가족 단위, 노비제 폐지 등 사회 전반의 변화를 고려할 때 차례상은 점차 간소해졌어야 사리에 맞다. 오늘날의 차례 문화는 가히 ‘역행’인 셈. 그리고 내 눈에는 이 2중의 간극을 메우고 있는 것이 구성원의 ‘희생’ 혹은 ‘착취’로 보인다. 구색을 빌미로 값이 몇 배로 뛴 식재료를 사 모으는 것이든, 가족이 다 먹지도 못할 음식을 만드느라 허리가 끊어질 때까지 요리하는 것이든. 차례를 지내지 않음이 무책임해 보일 수 있겠으나, 어쩌면 희생과 착취로 지탱되는 이 형식에 더 이상 종사하지 않겠다는 뜻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어른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지금 당장 차례 문화를 고쳐달라고. 스스로의 편의를 위해 고치는 것이 마음 불편하거든 후대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앞서 내가 명절 풍속을 좋아한다고 한 건 허투루 쓴 소리가 아니다. 지나간 삶에 감사하고 앞으로의 복을 빌기 위한 공동체 고유의 형식이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정성을 다함은 물론 그 형식의 중요한 요소일 터. 그러나 그 즐거움을 후대에 전하는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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