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애국지사 변호를 가장 많이 한 변호사가 가인(街人) 김병로, 긍인(兢人) 허헌, 애산 이인(李仁)이었다. 이들의 이름이나 호에 모두 ‘인’자가 들어가서 이들을 민족변호사 삼인이라고 부른다. 그중 한 명인 이인 선생은 변호사 개업 후 첫 사건으로 의열단사건을 맡게 된 것을 계기로 광주학생사건, 안창호사건, 수원고농사건, 6·10만세사건, 만보산사건 등 항일독립투쟁사에 남을 만한 굵직굵직한 사건에 거의 빠짐없이 관여하였다. 수원고농사건에서 불온 변론을 했다는 이유로 변호사 정직 처분을 받았으며 언론탄압 반대 연설회 등으로 여러 차례 유치장 신세를 졌다. 마침내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되어 4년 가까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미군정에서 수석대법관 및 검찰총장, 건국 후 초대 법무부 장관을 맡았다가 이승만 대통령과 뜻이 맞지 않자 물러났다.
이런 삶의 궤적을 가진 인물이라면 대체로 글씨체에 각이 뚜렷하고 필압이 강하다. 그런데 선생의 글씨는 그렇지 않고 부드러운 곡선이 두드러져서 강인함보다는 따뜻함이 더 많이 보인다. 테레사 수녀, 빌 게이츠같이 평생 봉사활동을 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글씨체로만 보면 선생은 지사, 투사보다는 자선사업가에 가깝다. 선생의 삶을 기록한 ‘애산여적’에 따르면 선생은 억울하면서도 돈이 없어 울고 헤매는 무산농민노동자의 하소연을 받아 30여 년간 침식을 잊어버리다시피 부지런히 심부름했고, 학자금이 없이 가두에서 방황하던 남녀 학생 1000여 명을 30여 년간 수용 지도했다.
선생의 이름 ‘仁’ 글씨에서 보듯이 오른쪽으로 갈수록 높아져서 매우 긍정적이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다리를 절었으면서도 항상 긍정적이었으며 그의 호 애산(愛山)이 말해주듯 산을 좋아했다고 한다. 가로와 세로선이 유달리 긴 것을 보면 끈기를 가지고 일을 제대로 해냈을 것이다. 필체로 분석해보면 선생은 강인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다 보니 항일투쟁에 뛰어들었고, 일을 제대로 하려다 보니 바른길을 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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