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곤의 실록한의학]〈60〉왕후의 코에서는 ‘분노’가 쏟아졌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9월 17일 03시 00분


연근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는 인조 16년(1648년) 15세의 나이에 왕후로 책봉됐다. 인조와 나이 차는 무려 29세, 하지만 인조는 후궁 소용 조씨만을 총애했다. 그 때문일까. 인조와 22세 때 별거한 후 독수공방하며 한 많은 삶을 마쳤다.

인조 23년 실록에는 “후궁 조소용의 이간질 때문에 딴 방에 별거하고 있다는 말이 떠돌았으나 비밀스러운 궁중의 일이어서 아는 자가 없었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결국 ‘떠돈 말’은 현실이 돼 왕후는 경덕궁(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긴다.

별거의 시발점은 왕후의 지병인 ‘풍간(風癎)’ 때문이었다. 현대적 병명으로는 간질. 의관들은 청심온담탕과 용경안신환을 처방하고 각 혈에 뜸을 뜨는 등 치료 경과를 일일이 임금께 보고했다. 그런데 인조는 갑자기 사헌부 사간원을 불러놓고 마치 왕비의 지병을 의관들이 자신에게 숨겨왔다는 듯 이렇게 하명한다. “중궁의 병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 때 걸린 것이 작년에 와서 재발해 근일에는 더욱 심해진 것이다. 어의인 최득룡이 왕비의 병을 알리지 않았으니 추고(推考)하라.”

실록은 인조의 이런 이상한 언행을 이렇게 해석했다. “임금의 의도가 죄를 다스리는 데에 있지 않고 그 병의 증상을 궁 밖으로 알리려는 데에 있었다….” 별거의 이유를 ‘후궁 조소용의 이간질’이 아닌 자신이 몰랐던 왕비의 지병 탓으로 돌린 것.

별거 후 1년, 장렬왕후는 코피를 쏟고 피를 토한다. 한의학은 이런 경우를 ‘칠정동혈(七情動血)’, 즉 극심한 스트레스나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비출혈(鼻出血·코피) 증상으로 진단한다. 조선시대에 간질을 앓았다는 사실을 속이고 왕후로 간택된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 일이었을까. 피를 토하는 왕후의 증상은 후궁 조소용에게 밀려난 분노와 억울함,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준다.

사실 비출혈 증상은 중병을 앓은 후 또는 극심한 노동 이후 발생하는 체력 저하가 원인인 경우가 많다. 현대의학으로 보면 고혈압, 동맥경화증, 간장질환으로 인한 비출혈이 중병에 속한다.

코에서 코피가 나면 먼저 얼음이나 차가운 수건으로 코 날개 부분을 덮어 혈관을 수축시키는 게 급선무다. 코 날개에서 비중격을 향해 두 엄지손가락으로 압박하면 혈관 부위가 압박되면서 지혈된다. 코피가 잦을 때는 술, 담배, 카페인, 매운 음식 등 혈관을 흥분시키는 음식은 피하는 게 좋고 무거운 짐을 드는 등 코 혈관에 압력이 가해지는 행동도 피해야 한다.

어의들이 장렬왕후에게 처방한 지혈제는 연근즙과 부들가루인 포황말이다. 연뿌리는 체내의 수분을 위로 끌어올려 코가 건조해지거나 얼굴에 열이 오르는 증상을 치료한다. 비출혈이나 코 건조증 치료에 쓰이는 명약이다. 심신 허약에 의한 코피에는 밤이 좋다. 구워 먹거나 속껍질 달인 물을 자주 먹으면 된다.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칠정동혈#비출혈#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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