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분단은 미소 냉전의 산물… 38도선도 ‘철의 장막’의 일부
한국 대통령, 평화공존 위해 북-미 대화의 중개자 역할
남북 이니셔티브로 비핵화 진전되면 분단 역사를 다시 쓰는 큰 걸음
한반도는 어떻게 분단됐는가. 이 단순한 질문에 정면에서 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38도선 설정이 그대로 분단이었다면 답은 비교적 단순하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한반도 분단은 두 개의 대전, 즉 제2차 세계대전과 미소(美蘇)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탄생한 ‘악마’다. 38도선 설정은 별도의 논리를 가진 2가지 프로세스의 제1단계, 즉 분단의 무대 설정에 불과했다.
물론 그 무대 설정은 분단의 당사자인 미국과 소련의 전쟁 목적이나 안전보장관을 반영하고 있었다. 대서양헌장이나 카이로선언에서 표명된 것처럼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이나 영토 불확대 등의 이념을 걸고 2차대전에 돌입한 데 비해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자신들의 지정학적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자국 주변에 방어적 공간을 확보하는 일에 집착했다.
그런 뜻에서 포츠담회담 전날 밤 헨리 스팀슨 육군장관이 지적한 것처럼 한국의 독립 문제는 ‘극동에 이식된 폴란드 문제’였다. 루스벨트나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폴란드 주권 회복과 자유선거를 요구했으나 스탈린은 “역사적으로 폴란드는 러시아를 공격하기 위한 통로였다”고 주장하며 자국에 유리한 국경선 설정과 친소 정권 수립을 정당화했다.
만약 유럽에서의 전쟁이 미소 양군에 의한 폴란드 분할점령을 동반했다면 전후 사태는 어떻게 진행됐을까. 소련이 폴란드의 일체성 회복(통일)에 응했을 것 같지는 않다.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폴란드도 분단됐을 것이다. 스탈린은 무엇보다 독일과 일본의 부활과 복수를 두려워해 경계선을 수정해 다음 전쟁에 대비하려 한 것이다.
다만 원폭 개발 성공이라는 거대한 군사기술혁명이 없었다면 한반도 분단도 없었을지 모른다. 맥아더 장군은 1945년 11월로 예정된 남규슈(九州) 상륙작전을 위해 모든 자원을 결집하고 있었다. 한반도 침공 작전은 소련군에 맡겨지도록 한 것이다. 바꿔 말하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이 한반도에서 미소의 군사적 입장에 균형을 가져왔다. 이것이 감춰진 비극이었다.
다른 한편, 미소의 전후 정책이 전반적으로 대립하면서 소련이 ‘발트해 슈체친에서 아드리아해 트리에스테까지’ 철의 장막을 친 것은 1946년 들어서의 일이었다. 그해 2월의 ‘신 5개년 계획’ 연설에서 스탈린은 3차대전의 불가피함까지 논했다. 그때 38도선도 ‘철의 장막’의 일부로 변화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는 그해 2월에 김일성을 수반으로 하는 북한임시인민위원회가 세워져 그다음 달 초부터 급진적인 토지개혁이 진행됐다. 소련 점령군 당국과 김일성 위원장은 북한 농촌을 ‘민주주의의 근거지’로 바꾸고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 임했다. 여기에 더해 7월에는 북한노동당, 이듬해 2월에 북한인민위원회와 인민회의가 발족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분단이란 ‘독립을 달성하려 하면 할수록 통일이 불가능해지고 통일을 실현하려 하면 전쟁이 불가피해지는’ 불편한 상태였다. 냉전의 발흥과 함께 먼저 가능한 지역에 정부를 수립한다는 단독정부론이 우세를 점했고 그것이 나아가 무력통일론으로 모습을 바꿔갔다. 그리고 실제로 북한군이 남침해 막대한 희생을 동반한 6·25전쟁이 3년간이나 계속됐다.
이 글 집필 중에 문재인 대통령의 북한 방문과 김정은 노동당 국무위원장과의 공동기자회견 모습이 보도됐다. 앞으로 상세한 내용이 나오겠지만 김 위원장이 조기 서울 방문을 약속한 듯하다. 분단 70년에 처음으로 한국 대통령이 미북 대화의 중개역을 맡아 남북 간 평화공존이 실현되려는 것처럼 보인다. 남북 공동의 이니셔티브에 의해 비핵화가 진전되면, 그것이야말로 분단의 역사를 다시 쓰는 큰 첫걸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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