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언제나 국익에 따라 행동한다. 우리는 미국의 주권(主權)을 글로벌 관료주의에 넘겨주지 않는다. 미국은 미국인이 통치한다. 우리는 글로벌리즘을 거부하고 애국주의를 환영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25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주권’을 10번, ‘독립’을 6번 언급했다. 더는 글로벌 리더라고, 세계의 경찰이라고 추켜세우면서 미국을 뜯어먹지도, 이래라저래라 하지도 말라고 했다. 미국의 슈퍼파워 포기 선언, 트럼프판 주권 독립 선언이었다. 최대 해외원조국 자리도 거부했다. 그는 “우리를 존중하는, 솔직히 말하자면 우방국들에만 원조를 하려고 한다”고 했다.
이런 트럼프의 연설에 유엔총회장은 뜨악한 침묵이 지배했다. 환호도 박수도 없는 좌중의 반응에 트럼프도 다소 흥을 잃은 듯 뚱한 표정으로 프롬프터만 따라 읽었다. 그나마 연설 초반에 터져 나온 웃음조차 없었다면 시종 교장 선생의 삭막한 훈시로만 들렸을 것이다.
“나의 행정부는 채 2년도 안 돼 미국 역사상 거의 모든 행정부보다 많은 성과를 이뤄냈다.” 그 순간 어디선가 흘러나온 웃음소리에 트럼프는 “정말 진짜다”라고 정색했다. 이내 키득거림이 폭소로 변하자 트럼프는 머쓱한 듯 혀를 날름 내밀고는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래도 괜찮다”며 연설을 이어갔다.
세계 언론들은 ‘트럼프가 장황한 자기 자랑을 하다 국제사회의 비웃음을 샀다’고 평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외려 “좀 웃기려고 일부러 그런 것”이라고 했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에겐 미국의 위상이나 책무는 그저 위선일 뿐이다. 그는 가식을 떨지 않는다. 그에겐 유엔 무대도 국내 유세장의 일부일 뿐이다. ‘군왕은 무치(無恥)’라는 옛말은 동서양을 관통한다.
트럼프의 강안(强顔)은 묘하게 일주일 전 김정은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백두산 천지에 오른 김정은이 한마디 했다. “춥다더니 춥지가 않네.”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의 답변이 걸작이다. “백두산에 이런 날이 없습니다. 오직 국무위원장께서 오실 때만 날이 이렇단 말입니다. 백두산의 주인이 오셨다고 그러는 겁니다.” 수령의 최측근이란 지위를 그냥 얻은 게 아님을 웅변해준다. 북한에서 아부는 생존의 기술, 아니 예술 경연이다.
그런데 의외였던 것은 김정은이 보인 반응이었다. 그는 머쓱한 듯 고개를 돌려 멀찍이 가버렸고, 그런 김정은을 부인 리설주가 다소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측근의 아부엔 이골이 났을 젊은 독재자지만 손님 앞에선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이것도 손님을 혹하게 만드는, 트럼프의 뻔뻔함을 능가하는 속임수일까.
남쪽 대통령을 2박 3일 시종 수행하다시피 하며 “초라하다”고 겸손을 떤 김정은이다. 그런 그는 “우리가 속임수를 쓰면 미국이 강력하게 보복을 할 텐데, 그 보복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느냐”며 이번에야말로 비핵화의 진정성을 믿어 달라고 했다고 한다.
김정은은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도 트럼프를 그렇게 깍듯이 대접했을 것이고, 트럼프도 그런 김정은을 “믿는다”고 거듭 말했다. 외교관계에서, 특히 정상 간에는 진짜 믿어서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신하더라도 신뢰를 공언해야 한다. 못 믿겠다고 하는 순간, 외교는 사라지고 대결을 각오해야 한다.
머지않아 두 사람이 다시 만난다. 없는 진실도 우기며 만들어가는 트럼프와 외면하고픈 현실에 진정성을 호소해야 하는 김정은이다. 사자와 여우의 만남이다. 국제정치에선 파워가 정의이고, 상황이 진실에 앞선다. 믿는다지만 못 믿는 상황을 두 사람이 믿음직한 현실로 만들어낼지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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