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라디오에서 설전이 펼쳐졌다. 누구는 평양냉면이 더 맛있다, 누구는 함흥냉면이 더 맛있다. 그렇게 평양파와 함흥파가 설전을 벌이는 사이 옆에 있던 출연자에게 “그쪽은 어느 파예요? 평양이에요? 함흥이에요?”라고 묻자 출연자가 대답했다. “저는 칡 팝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마 올해 최고의 음식을 꼽으라면 ‘평양냉면’일 것 같다. 남북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했고 역대급 무더위도 한몫했다. 평양냉면은 학창시절 나에게 평양냉면을 입문시켜 줬던 그 애를 생각나게 한다. 늦여름 친분이 별로 없었던 그 애가 “오빠, 평양냉면 좋아하세요?” “어? 평양냉면? 나… 한 번도 못 먹어 봤는데….”
충청도 촌놈으로 쫄면은 먹어 봤어도 냉면, 그중에서도 평양냉면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저랑 평양냉면 먹으러 가실래요?” 따라간 곳은 서울 필동에 있는 냉면집. 맑은 육수에 주먹만 한 면이 있고 고춧가루가 살짝 뿌려진 비주얼. “이 집은 고춧가루가 포인트예요. 고춧가루가 느끼함을 싹 잡아 주거든요.” 면을 먹었는데 별맛을 느낄 수 없었다. 육수 또한 밍밍한 것이 무슨 맛인지 알 수 없었다. “딱 세 번만 먹어 보면 푹 빠질 거예요!” 그 애는 푹 빠져 있었다. “냉면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식초랑 겨자를 팍팍 치는 모습을 보면 냉면집 사장님이 속상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정성껏 육수를 우려냈는데 맛도 안 보면 서운하다고 하시며 육수에 식초 맛이 나는 게 싫어서 젓가락으로 면을 들고 면에만 식초를 뿌려서 드시더라고요.”
그날 이후 평양냉면 투어를 시작했다.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이 마포 평양냉면집! “오빠, 여기는 면이 특히 맛있어요. 메밀이 많이 들어가거든요. 그리고 이 집 식초가 정말 맛있어요. 면에만 식초를 살짝 뿌려서 먹고 육수를 마셔 보세요.” 하루는 전철을 타고 평양냉면을 먹으러 의정부까지 갔다. “오빠, 냉면은 여름보다 겨울에 먹는 게 더 맛있어요. 여름에는 손님이 너무 많다 보니까 육수 퀄리티를 지키기가 쉽지 않거든요.”
우리는 6개월 넘게 평양냉면 투어를 다니며 많이 친해졌다. 하루 종일 함께 있다가 헤어질 때면 아쉬워 지하철역에서 막차가 올 때까지 손을 꼭 잡고 있고, 헤어지면 바로 집에 가서 삐삐에 “보고 싶다”는 음성을 사서함에 남기며 슴슴하지만 중독성이 있는 평양냉면 같은 연애를 했다.
어느 날 내가 친구들과 오장동 함흥냉면을 먹으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 애는 불같이 화를 냈다. “오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왜?” “어떻게 함흥냉면을 먹을 수가 있어요? 그건 배신이죠!” 함흥냉면 먹은 게 배신이라니, 칡냉면 먹었으면 변절자라도 되는 건가. 그 애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편지도 쓰고 삐삐 음성사서함에 “나 친한 형 중국집 아들인데, 그 형네 아버지도 집에서는 짜장라면 끓여 드신대! 내가 평양냉면에서 함흥냉면으로 갈아탄 것도 아니고 딱 한 번 먹었는데 너무하는 거 아냐? 아니 아니 내가 미안해. 다시는 함흥냉면 안 먹을 게!” 하지만 우리 연애는 그렇게 끝이 났다. 지금도 내가 배신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금도 함흥보다는 평양 쪽이니까. 저녁이면 바람이 선선하다. 평양냉면은 역시 선선할 때 먹어야 제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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