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지난달 29일(현지 시간) 유엔총회 연설에서 “미국에 대한 신뢰와 우리 국가안전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먼저 핵무장을 해제하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비핵화 의지는 확고부동하지만 이것은 미국이 충분한 신뢰감을 가지게 할 때만 실현 가능하다”며 ‘상응조치’를 요구했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가시화되자 6·25 종전선언과 대북제재 완화까지 얻어내겠다는 의도를 노골화한 것이다.
리용호의 유엔 연설은 1년 전에 비하면 한결 유화적이다. 그는 지난해 연설에서 “미국이 군사공격 기미를 보일 때는 가차 없는 선제행동으로 예방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협박했고, 기자들과 만나서는 ‘태평양 수소탄 시험’까지 시사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올해 연설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용기에 감사하다”고까지 했던 것과 비교하면 이번 연설도 대미(對美) 비난 일색이다.
북한은 중국 러시아가 대북제재 완화 목소리를 높이고 한국도 묵시적으로 동조하고 있다는 판단 아래 국제사회의 제재 완화 분위기를 만들겠다는 속셈인 듯하다. 리용호는 “핵·미사일 시험이 중지된 지 1년이 됐지만 제재 결의들은 토 하나 변한 게 없다”고 했다. 주한 유엔군사령부까지 겨냥했다. “미국의 지휘에 복종하는 유엔사가 신성한 유엔의 명칭을 도용하고 있다”며 유엔사가 남북 철도 연결을 위한 공동조사를 막으려 한 점을 문제 삼았다.
이런 북한의 태도는 어렵사리 복원돼 가는 북-미 대화를 어렵게 만들 뿐이다. 두 번째 북-미 정상회담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릴 실무협상을 거쳐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4차 방북이 이뤄져야 공식화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11·6 중간선거까지는 북한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좋은 관계’만 강조할 가능성이 높다. 지난달 29일 유세에선 “김정은과 사랑에 빠졌다”고까지 했지만, 그는 늘 “나는 북한에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는 말을 빠뜨리지 않고 있다.
앞으로 10월 한 달, 북-미 관계는 표면상 우호적이지만 막후에선 지루한 샅바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북한이 무리한 요구로 불신만 키우면 트럼프 행정부도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김정은은 9·19 평양선언에서 조건 없이 동창리 미사일시험장을 폐기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후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향후 협상과 연계하려는 의도가 아닌지 의심된다. 약속한 조치부터 신속하게 이행해 신뢰를 얻지 않고선 북-미 간 교착상태는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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