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가 유럽으로 가지고 건너갔다고 알려진 식재료 중 하나인 고구마는 16세기에 이르러 스페인, 포르투갈 사람들에 의해 동남아시아, 필리핀, 중국을 거쳐 17세기에 이르러서야 내 고향 일본 오키나와에 들어왔다. 하지만 콜럼버스 이전부터 또 하나의 길이 있었다.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잉카와 왕래했음이 밝혀졌다. 인류학자이자 해양생물학자, 탐험가인 토르 헤위에르달 박사가 1947년 당시 사용했던 나무배를 재현해 직접 체험하여 밝혀낸 것이다.
어릴 적 우리 할아버지는 사탕수수와 함께 고구마를 기르셨다. 사탕수수는 팔고 고구마는 집에서 먹기 위해 길렀다. 당시에는 모종이라는 것도 없었고 고구마에서 순이 나오는 대로 흙을 펼쳐 덮고 물을 흠뻑 주면 끝이었다. 텃밭의 다른 채소들과 달리 잡초를 제거하거나 물을 주는 일도 없이 방치되었지만 오키나와의 뜨거운 햇볕 아래 잘 컸다. 텃밭 근처에 염소와 닭, 돼지를 함께 키우고 있었는데 염소나 닭은 신경 쓸 일이 없었지만 돼지는 우리 속에서 200kg의 몸을 꼼짝하지 않고 먹어 대는 놈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 10마리 정도 새끼를 낳으면 내다 팔았다. 할머니는 식구들이 먹고 남은 음식에 고구마 줄기를 잘라 넣고 죽처럼 끓여 정성스럽게 준비했다. 나는 옆에서 불이 꺼지지 않도록 관리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일이 거의 끝나갈 때쯤이면 꺼져가는 불 속에 고구마 몇 알을 넣어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최고의 군고구마가 보상으로 주어졌다. 할머니는 흰색과 보라색 고구마 2가지를 키우셨는데 보라색이 예쁘기는 하지만 맛은 흰 것이 더 달다.
오늘날 오키나와 보라색 고구마는 파이나 케이크, 아이스크림과 쿠키 등 특산물로 넘쳐난다. 고구마로 만든 첫 디저트는 미국으로 끌려간 흑인 노예로부터 시작되었다. 요리를 하고 꺼져 가는 장작이 재가 될 때쯤 고구마를 통째로 넣어 익혔다. 껍질을 벗기면 고구마의 당성분이 마치 전체를 설탕으로 코팅한 듯한 느낌이었다. ‘캔디드-맛탕’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생겨났다.
당시 흑인들에겐 부엌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흑인들이 자기 집에서 직접 고구마파이를 만들어 먹기까지는 1863년 1월 1일 링컨 대통령이 350만 명 노예해방을 선언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추수감사절에 흔히 만드는 호박파이가 백인 거주 지역인 뉴잉글랜드의 미국 북부를 대표하는 파이라면 고구마파이는 흑인들에 의한 남부의 미국 음식을 대표하는 파이였던 것이다.
1732년 일본 시코쿠와 규슈 지역에서는 극심한 가뭄이 들어 17만 명의 사람이 굶어 죽었다. 그런데 훗날 통계자료가 만들어졌을 때 가고시마와 나가사키 지역에서는 단 1명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은 사실이 확인됐다. 경작을 포기한 척박한 땅에서도 자라난 고구마 덕분이었다. 우리 집도 저녁에 고구마가 보이면 쌀이 떨어졌다는 얘기였다. 며칠 기다려 아버지의 월급날이 되어서야 다시 쌀밥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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