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고구려의 방어선은 북쪽 신성(현재 중국 랴오닝성 푸순 부근)에서 남쪽 비사성(랴오닝성 다롄)까지였다. 이 중앙에 요동성과 건안성(현재 허난성 카이펑)이 버티고 있었다.
수나라는 요동성을 뚫지 못했지만 645년 당군은 요동성과 백암성을 차례로 함락하고 고구려 방어선 중앙에 돌파구를 열었다.
그 뒤에 안시성이 있었다. 안시성은 3개월간 당군의 포위를 버텨내 침공을 좌절시켰다. 안시성이 함락된다고 해서 고구려가 망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후 지속된 고구려와 당의 전쟁사를 봐도 안시성 다음으로 압록강과 청천강, 대동강의 방어선이 있다. 평양성도 최후의 보루로 포위전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다만 안시성 인근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 주력군이 패배했기 때문에 평양까지의 방어선이 꽤 허술해졌을 것이고 안시성이 함락됐다면 고구려의 피해도 더 컸을 것이다. ‘안시성만 떨어졌어도 고구려는 망했다’라는 말은 당나라 측에서 보인 아쉬움이었다. 이 말이 안시성 전투의 비중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다. 안시성은 우리가 도주해도 2차, 3차 방어선이 있다는 유혹을 이겨냈다.
요동성과 백암성이 함락되고 수십 개의 성이 방어를 포기하고 도주했지만 안시성은 자신의 위치를 지켰다. 이 전투로 당의 침공은 좌절됐고 한 개의 성이 당의 대군을 막아낼 수 있음을 증명했다.
자신의 위치에서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 이것은 전쟁사가 줄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실례의 하나다. 지금 우리 사회는 능력도 없는 자들이 권리만 누리려고 하고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풍조가 만연하다. 안시성의 교훈이 먼 나라 일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하긴 꽤 오래전 일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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