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푸른 시절의 손바닥이 저렇게 붉어서 검은 눈물 같은 사랑을 안고 있는 줄 알게 되어 이제는 당신의 저만치 가 있는 마음도 좋아요
내가 어떻게 보았을까요, 기적처럼 이제 곧
푸르게 차오르는 냇물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재와 붕장어의 시간이 온다는 걸 선잠과 어린 새벽의 손이 포플러처럼 흔들리는 시간이 온다는 걸 날아가는 어린 새가 수박빛 향기를 물고 가는 시간이 온다는 걸
떠날 날은 누구도 몰라서 부고는 늘 낯설다. 이 낯섦 속에서 허수경 시인이 남긴 작품들을 다시 생각한다. 한 사람의 죽음이 왜 이다지도 슬픈지. 슬퍼서 추모의 글을 찾아 읽다가 놀라고 말았다. 시가 시의적절하지 못한 시대라는 말은 틀렸다. 품에 시를 묻어놓은 이들이 저렇게 많다.
슬프다는 말은 사실 시인에게 빚진 위안이 있다는 말. 청춘의 고달픔을 지독히 쓸쓸한 단어와 온기로 달래주어 고맙다는 말. 그 말을 전하지도 못했는데 벌써 떠나가니 무척 미안하다는 말과 같다. 더불어, 그가 떠나서 슬프다는 말은 저마다가 자신의 “둥근 적이 없었던 청춘”을 애도한다는 말. 타인도 자기 자신도 나의 벗이 되지 못했을 때 시가 벗이 되었다는 말. 시라는 등불에 의지해 터널 더듬던 날이 우리에게 있었다는 말과도 같다.
허수경 시인은 시 ‘수박’처럼, 검은 절망과 붉은 사랑과 푸른 희망을 함께 이야기해 왔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그가 떠나서 슬프다는 말은 절망과 사랑과 희망이 손잡고 만드는 그 하모니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읽는 이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고, 아픈 마음들에 대해서 더 많이 아프게 아파한 시인, 그리고 그 시와 함께한 우리 모두의 시간에 애도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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