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대법관 청문회서 울먹였던 캐버노, 자질 부족 비판받아
‘남자의 눈물’ 긍정평가 옛말
여자는 ‘눈물의 호소’ 역시 옛말… 홍대 몰카로 촉발된 분노의 시위
남녀불문 과잉 감정표출 경계해야
울먹이는 남자가 있다. 전 국민이 지켜보는 인준청문회에서. 고교 시절의 성폭행 미수 의혹으로 상원에서 곤욕을 치르고 구사일생으로 어제 미국 연방대법관에 취임한 브렛 캐버노의 해프닝이다. 그의 눈물에 보내진 동정표도 있지만,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려는 불순한 의도인가 아니면 감정 하나 조절 못 하는 공직 부적격자인가라는 비판의 화살이 더 거셌다.
두 차례의 표결에서 한두 표 차로 인준안이 통과됐으니 집권 공화당의 승리인지는 모르나 상처뿐인 승리인 것 같다. 공직 후보자에게 어떤 하자가 발견되든 양극화된 정당 체제에서는 숫자 싸움으로 결판난다는 자명한 사실이 거듭 확인되었을 뿐이다. 우리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코드 인사로 미 최고법원의 무게중심은 오른쪽으로 기울었고, 언론은 이렇게 평한다. ‘캐버노의 지명으로 연방대법원은 한층 더 정치화되었다’(워싱턴포스트), ‘한때 정치 위에 있던 대법원은 이제 당파적으로 되었다’(가디언). 법원의 신뢰를 실추시키는 ‘사법의 정치화’는 여기나 저기나 무슨 유행병처럼 되어버린 것일까.
굵직한 현안을 제치고 미 국민의 이목을 사로잡은 캐버노 청문회에서는 성폭행 의혹과 별개로 ‘남자의 눈물’이 부각됐다. 피해자인 여교수가 의연하게 증언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가해자로 지목된 대법관 지명자의 대응은 감정을 직설적으로 분출하는 식이어서 처음부터 그 인성과 태도가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사정이 어찌 되었건, 긴박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냉철한 이성을 견지해야 할 대법관에는 자격 미달이라는 자질론이 제기됐다.
거기 불을 지핀 것이 눈물이었다. 감정에 북받쳐 울컥하는 모습에 많은 사람이 눈살을 찌푸렸다. 공화당 정권 때 지명되어 35년간 연방대법관을 지낸 존 폴 스티븐스(98)가 그의 태도에 실망해 “캐버노의 능력과 관계없이 나는 등을 돌렸다”며 “청문회에서 보여준 그의 연기 때문”이라 말할 정도였다. 보수 내부의 비판에 당황한 듯 캐버노는 이례적으로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문까지 보내 구구히 변명했다.
‘남자는 울지 않는다’는 관습적 압박이 심했던 과거엔 남자의 눈물이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경우도 꽤 있었다. 높은 지위에 오른 여자가 울기라도 하면, 불안정한 성격이니 어쩌니 비아냥댄 것과 달리 사회적 권위를 가진 남자가 어쩌다 눈물을 흘리면 풍부한 감성과 배려심을 가진 듯 미화되는 일도 종종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달라졌다. 젠더 중립을 외치는 21세기, 남자도 힘들거나 슬프면 울음을 참지 말 것이며, 여자도 마음 상태를 눈물로 얼버무리지 말고 솔직히 표현하라고 부르짖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래선지, 여자도 감정을 울음 대신 분노로 폭발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US오픈 테니스 결승전에서 세리나 윌리엄스가 판정 불만에 심판에게 거칠게 항의해 고액의 벌금 징계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성차별 논란이 벌어졌다. 경기 직후 윌리엄스는 당당히 말했다. “여성의 권리와 평등을 위해 싸우는 중이다. 다른 남자 선수들이 심판에게 같은 행동을 해도 페널티 받은 적이 없다.” 세계여자프로테니스협회도 이에 공감한 성명을 발표했다. 감정 표현에도 남녀 공히, 기준은 같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인식의 공유였다.
남자의 눈물, 여자의 분노는 한국에서도 눈에 띈다. 최근 사례로는 평양을 방문한 어느 장관이 과거 노무현 대통령의 기념식수 앞에서 울먹였다. 대통령의 눈물도 이런저런 행사장에서 드물지 않게 접하게 된다. 그런 한편에, 여성들은 역으로 눈물의 호소 대신 다른 것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올해 5월 ‘홍대 누드 몰카’ 사건 이후 경찰과 사법부가 편파적이라며 분노하는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6일 혜화역 집회에서는 ‘여성 인권 없는 나라 멸망해라’ 같은 구호가 나오고, 남성에 대한 조롱을 담아 개사한 노래도 불렸다 한다. 그 일각에 여성 우월주의를 외치는 커뮤니티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혐오를 다방면으로 확산하며 극단적 형태로 쏟아내는 중이다.
눈물에 대한 사회적 관점이 달라지고 있다. 남자는 울지 않는다는 식의 남자다움의 추구, 여자는 감정을 절제해야 한다는 식의 여자다움의 추구는 케케묵은 시대착오 공식처럼 되어버렸다. 그나저나 남자건 여자건 감정의 극적인 노출이 일상화되는 공동체는 불안하고 위험하다. 눈물도 분노도 그 자체로 비난받을 이유는 없지만, 그 의도가 불순하거나 그 표현이 무절제하다면 또 얘기가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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