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꾼.’ 과거에 뱀 잡는 사람들을 그렇게 불렀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직업이다. 보통 농사꾼, 장사꾼, 낚시꾼처럼 ‘○○꾼’은 그 분야 전문 종사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뱀 잡는 사람은 왜 뱀꾼이 아닌 땅꾼일까. 땅꾼과 뱀의 인연은 18세기 후반 조선 영조 때로 올라간다.
영조의 여러 업적 중 하나는 청계천 준설이다. 한양 중심을 흐르는 청계천이 자꾸 넘치자 1760년(영조 36년) 바닥 준설 사업을 했다. 기록을 보면 당시 참여인원 20만 명 중 6만 명이 빈민이었다. 영조는 빈민들에게 일을 시키고 노임을 주었다. 요즘의 공공근로사업처럼 청계천 준설을 일종의 도시빈민 구제책으로 활용한 셈이다.
당시 하천 바닥을 파낸 엄청난 양의 흙을 한곳에 모으면서 커다란 산이 생겼다. 인공으로 쌓은 산이라 해서 가산(假山)이라고 불렀다. 이 가산이 홍수에 토사가 밀리지 않도록 나무와 꽃을 심어 보완했다. 이때 심은 나무와 꽃으로 향기가 가득하다 해서 이 동네 이름이 ‘방산동(芳山洞)’이다. 지금의 청계천 방산시장이 있는 곳이다.
준설 공사가 끝났지만 갈 곳 없는 빈민들은 가산에 토굴을 파고 생활을 했다. 땅속에 산다고 해서 ‘땅꾼’이라 불렸다. 일거리가 없어 굶어죽기 일쑤였던 이들에게 영조는 뱀을 잡아 파는 독점적 권리를 부여했다. 조선시대 상업은 대개 국가에서 부여한 독점권에 기초해 유지됐다. 이 때문에 청계천 땅꾼이 아니면 뱀을 잡아 시장에 내다 팔 수 없었다. 땅꾼이 뱀을 잡는 사람들의 대명사가 된 이유다.
땅꾼과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직업 중 하나가 ‘전기수(傳奇叟)’다.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이상하고 신비스러운 이야기를 읽어주는 노인이란 뜻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심청전, 홍길동전, 춘향전 같은 소설을 돈을 받고 낭독해 준 전문 직업인이다.
조수삼(趙秀三)의 ‘추재집(秋齋集)’에 따르면, 전기수는 종로에서 동대문 사이를 6일 간격으로 오르내리면서 일정한 장소에서 정기적으로 소설을 낭독하였다. 흥미로운 대목에 이르면 소리를 그치고 청중이 돈을 던져주기를 기다렸다가 낭독을 계속했다고 한다. 낭독 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임경업전을 읽던 전기수를 간신 김자점으로 착각한 한 청중이 뛰어들어 낫으로 낭독 중인 전기수를 찔렀을 정도라고 한다.
한국 문학사에서 18, 19세기는 ‘소설의 시대’라고 불린다. 남녀노소, 양반 상민 할 것 없이 소설을 읽으려 했다. 영리를 목적으로 싼값에 찍어낸 방각본(坊刻本) 소설이 유행했고, 돈을 받고 책을 빌려주는 책방인 세책가(貰冊家)가 성행했다. 소설로 먹고사는 직업들이 생겨났다는 것은 그만큼 소설의 인기가 높았음을 반영해준다. 1960년대까지 명맥을 유지해왔던 전기수는 라디오, TV가 보급되면서 완전히 사라진다. 직업의 생성과 소멸은 이처럼 그 시대의 경제 사회상을 그대로 반영해준다. 그런 만큼 사라진 직업의 연구를 통해 죽은 역사를 살려낼 수도 있다. 조상들의 직업들이 새삼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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