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동안 아무런 진전이 없었는데, 3개월 지난 거 가지고 뭐라고 하나? 어이가 없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9일(현지 시간) 백악관 오벌오피스(집무실)에서 북-미 대화의 진전 속도를 두고 불만을 나타내는 현지 언론과 전문가들을 겨냥해 이렇게 말했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성과가 없다고 비판의 화살을 겨누는 사람들이 너무하다는 이야기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이 지금까지 이룬 북-미 대화 성과를 강조하려고 반복해온 표현이다. 새롭고 신선한 부분은 북-미 간 긴장국면 기간을 ‘80년’이라고 언급한 대목이다.
올해로 6·25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65년 됐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머릿속 역사책’에선 그 숫자가 거의 그때그때 다른 수준이다. 그는 4일 미네소타주 유세에서는 “(북-미 갈등이) 75년간 이어졌다. (싱가포르 회담이 끝난 지는) 고작 3개월이 됐다”고 말했다. 이틀 뒤 6일 캔자스주 유세에서는 “지난 70년 동안 (전임자들은) 뭘 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랬다가 사흘 뒤 9일엔 돌연 ‘80년’이란 숫자가 등장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필요에 따라서는 중요한 정상회담 합의문에 적힌 조항 순서도 거리낌 없이 바꾼다. 그는 같은 날 오벌오피스에서 기자들에게 “우리(자신과 김정은)는 (싱가포르에서) ‘포인트 넘버원’으로 ‘비핵화’를 이야기했다. 언론이 이를 놓치는데, 실제로 (비핵화가) ‘넘버원’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도출된 공동선언에서 ‘포인트 넘버원’은 “(북-미가)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기로 약속했다”는 내용이다. 비핵화 관련 내용은 ‘포인트 넘버스리’에 들어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31년 전 자신의 저서 ‘거래의 기술’에서 “나는 홍보를 위해 허장성세를 사용한다. 사람들은 무언가가 가장 크고, 가장 위대하고, 가장 멋지다고 믿길 원한다. 약간의 과장은 결코 해가 되지 않는다”라고 적었다. 이 화법을 그는 ‘진실한 과장법(truthful hyperbole)’이라고 불렀다. 사업가 시절 썼던 이 화법을 그는 집권 2년 차 대통령이 돼서도 여전히 애용한다. 싱가포르 회담 이후 북한 비핵화가 지지부진했던 기간을 조금이라도 더 짧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라면 6·25전쟁이 실제로 언제 끝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직접 서명한 북-미 공동선언의 조항 순서도 우격다짐 식으로 바꿔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때론 거짓말을 진실처럼 미화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진실한 과장법’이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것이 분명하다는 듯 취임 후에도 이 방식으로 대중과 소통해 왔다. 자신의 취임식에 참석한 청중 규모가 사상 최대라고 주장했다. 대선에서 이겼지만 전체 총득표수에서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에게 밀렸던 이유는 ‘불법 투표’ 때문이라고 했다.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지만 트럼프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주장의 진위보다 골수 지지층의 열광적 지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소통 방식에 지지층조차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하는 조짐이 보인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11일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이 애청하는 폭스뉴스에서 방송되는 대통령의 유세 시청률이 예전 같지 않다고 보도했다. 시청률조사기관 닐슨 자료를 분석한 이 매체에 따르면 대통령의 유세 생중계는 지난해 많게는 전국 시청자 400만 명을 확보했지만, 올해 들어선 250만∼350만 명을 끌어들이는 데 그쳤다.
최근 유세 빈도가 늘면서 주목도가 떨어진 것이 주요 원인이겠지만 행정부가 하는 모든 일이 ‘위대하다’는 식의 과장된 표현에 일부 지지자들은 예전만큼의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분석이다.
‘진실한 과장법’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지금까지 적잖은 성공을 가져다 줬다. 하지만 그 ‘마법의 지팡이’는 유권자들의 ‘익숙함’이란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마주하기 시작했다. 그 1차 대결 성적표가 11월 중간선거 결과가 될 것이다. 선거가 끝나면 곧바로 집권 후반기로 접어든다. 자신이 남발한 호언장담에 익숙해진 미 국민에게 신선한 성과를 새롭게 보여줘야 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부담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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