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고객을 상대하는 식당 서버나 바텐더들의 주요 소득은 손님들이 주는 팁이다. 팁은 식당 사장도 손댈 수 없다. 주방에서 일하는 요리사나 설거지하는 직원도 가져갈 수 없다. 오로지 고객을 직접 상대하는 서버나 바텐더 등에게 돌아가는 미국 특유의 보상 시스템이다.
캘리포니아 오리건 등 7개 주를 뺀 대부분의 지역에서 팁을 받는 근로자에 대한 최저임금은 따로 적용된다. 워싱턴의 최저임금은 시간당 13.25달러(약 1만4900원)인데 팁을 받는 직원들은 3.89달러에 불과하다. 짠돌이 손님만 상대하는 운수 나쁜 날도 있지만 후한 손님을 만나면 주머니가 두둑해진다.
워싱턴의 시민단체와 진보 정치인들은 ‘러시안룰렛’처럼 예측 불가능한 ‘팁 근로자’의 소득을 안정시켜 주기 위해 꾀를 냈다. 팁 근로자의 최저임금도 일반 근로자처럼 의무적으로 2026년까지 시간당 15달러까지 올리는 제안을 주민 투표에 부쳤다. 이 제안은 주민 56%의 찬성으로 통과됐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암초를 만났다.
최저임금 인상을 부담해야 할 식당 사장은 물론이고 이 정치적 결정의 수혜자인 팁 근로자들마저 반기를 들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워싱턴 식당의 인건비는 총 비용의 40% 정도를 차지한다. 메트로폴리탄워싱턴음식점협회(RAMW)는 팁 근로자들의 최저임금이 15달러로 오르면 연간 6억 달러의 비용이 늘어난다고 주장한다. 식당 사장들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비싼 지역 농산물보다 값싼 외국산 재료를 쓸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팁 근로자들은 손님들이 최저임금 인상을 핑계로 팁을 적게 주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팁을 받지 못하는 요리사, 주방 설거지 담당 등은 팁 근로자의 최저임금 인상이 식당 경영난으로 이어져 ‘직원 해고’와 ‘자동화’의 보조금으로 변질될까 걱정한다. 워싱턴 식당 종업원들은 “SAVE OUR TIPS(팁을 지켜주세요)” 같은 항의 명찰을 가슴에 달고 최저임금 인상 폐지 운동을 벌였다.
식당 사장부터 근로자들까지 들고일어나자 워싱턴 시의회는 이달 초 8 대 5로 팁 근로자의 최저임금 인상 방안을 뒤집었다. 월스트리저널(WSJ)은 ‘팁을 받는 대중의 반란’이라는 칼럼을 통해 “음식점 근로자들이 시의회에 경제학을 교육했다”고 전했다. 반면 좋은 뜻에 동의해 최저임금 인상에 찬성한 시민들은 “의회가 시민의 목소리를 뒤집었다”며 뿔이 났다. 설익은 정책 추진이 정치적 혼란만 가중시킨 것이다.
지난해 메인주도 2016년 주민 투표로 결정된 팁을 받는 근로자의 최저임금 인상을 뒤집었다.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시는 시간당 최저임금을 오히려 깎았다. 마차가 말보다 앞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인상 자체보다 시장 현실을 이해하고 인상을 위한 기초체력부터 다지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노력했다면 이런 식의 ‘도돌이표 정책’은 없었을 것이다.
최저임금 인상 같은 선의로 포장된 정책의 뒷감당을 하지 못해 쩔쩔매는 일이 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프랜차이즈 회사, 신용카드사, 건물주 등에 대한 책임 떠넘기기도 반복된다. 12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의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한 외식사업가인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가 “의원님, 이건 너무하신다”라며 시장 현실에 둔감한 정치권을 아쉬워했다. 그는 “외식업을 인터넷이나 유튜브를 통해 배우는 것이 전부다. 준비 과정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정책이 있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정부와 정치권이 남 탓하기 전에 제 할 일부터 제대로 하라는 게 ‘백종원표 자영업 특강’의 메시지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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