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우리 집 사과농사는 망했다. 견딘 놈들도 있지만 일찌감치 반 이상이 날아갔고 남아있는 것들도 쓸 만한 것들이 없다. 말 그대로 폭망이다. 그런데도 레돔은 사과밭으로 갔다. 어제도 갔고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갈 것이다. 참 고집도 대단하다. 이역만리 와서 짓는 농사니 풍년이 들어 덩실덩실 춤을 춰야 할 텐데, 그날이 언제일지 참 멀기만 하다.
“사람들이 유기농 사과농사 절대 안 된다고 하던데 정말 그런가 봐. 그동안 들인 그 정성이 참 허무하다. 쐐기풀, 민들레, 은행잎…. 온갖 것들 달여 먹였는데 이 사과 좀 봐….”
참아야 하는데 내 입에서는 자동적으로 잔소리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흘러나왔다. 레돔은 예초기를 메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 가끔 멈춰 서서 근심 어린 표정으로 나무둥치를 쓸거나 나뭇가지와 잎들을 들여다보았다. 사과농사 2년째, 금지옥엽으로 돌봤으나 우리들의 사과는 여전히 병들거나 썩거나 벌레 먹거나 찌든 것들뿐이었다. 병든 사과를 들여다보는 그의 눈길이 어찌나 슬퍼 보이는지 나는 뚝 잔소리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들이 아플 때 뜨거운 머리에 손을 대면서 내가 짓던 걱정스러운 표정 그대로였다.
“농사 이래 지마 안 된다니까. 영양제를 듬뿍 줘야 힘을 받아서 사과가 열리지.”
이렇게 말한 사람은 어디선가 나타난 동네 어르신이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또 다른 ‘어르신 2’가 나타나서 한마디 거들었다. “아이고 이제 사과나무 다 죽게 생겼다….” 그러자 또 다른 어르신 3이 나타났다. “내가 발로 지어도 이보다는 낫겠다.” 한마디 하니 또 다른 어르신 4와 5가 나타나서 그동안 근질근질했던 입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프랑스 사람 참 고집이 세네. 왜 약을 안 치나. 아이고 이제 이 나무들 다 죽게 생겼다.”
어르신 1부터 5까지 돌아가며 와글와글 한숨과 곡소리를 내자 레돔은 사과밭 구석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예초기 시동을 걸어 풀을 베기 시작했다. 이제 좀 가주세요, 라는 뜻이었으나 어르신들은 후렴까지 다 불렀다.
지금이라도 영양제 좀 치고, 바닥에 반사필름 깔면 좀 나을지도 모른다. 이미 늦었어. 그래봤자 얼마나 건지겠어. 팔 건 하나도 없어. 팔 게 아니고 와인 만들 거라잖아, 그러니 괜찮아. 아이고, 우리 사과나무 어쩌나…. 원래 이 나무들 시원찮았으면서. 뭐? 우리 사과나무가 얼마나 생생했는데…. 삼십 년 전이 좋았지. 그래 사과 꽃 필 때. 나도 장가를 그때 갔다니까. 마누라 고생 많이 했지. 어르신들 사과밭 수다는 오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사과는 여타의 다른 여름 과일에 비해 늦가을까지 나무에 매달려 있어야 한다. 길게 견뎌야 하는 것이 사과의 운명이다. 한 알의 사과를 먹는다는 것은 일 년의 햇빛과 바람과 병고와 해충을 견딘 시간의 결정체를 삼키는 것과 같다. 봄부터 소쩍새가 그리 우는 것은 푸른 사과 꽃이 새빨간 사과까지 달려가라는 피맺힌 응원과 같다. 그만큼 긴 시간 온갖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그것을 견딘 것들만이 온전한 사과가 된다. 사과 한 알을 먹을 때 다들 인사를 해야 한다. ‘안녕, 사과야. 누가 너를 키웠니. 참 고맙구나.’ 이렇게.
“앗 이것 봐. 지렁이다! 지렁이가 왔어!”
레돔은 풀을 베다 말고 예초기를 던지고 무릎을 꿇었다. 어르신들은 그가 무슨 보물이라도 찾았나 싶어서 우르르 달려갔다. 레돔이 통통한 지렁이를 손바닥에 올려 모두 앞에 내보이며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땅이 살아나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여기 있어요.”
“무슨 소리야. 우리 땅은 죽은 적 한 번도 없었어. 그럼!”
레돔의 말에 어르신이 대꾸했다. 네네, 감사합니다. 메르시. 메르시 보쿠. 레돔은 행복한 농부가 되어 다시 예초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농사를 짓는 일은 고된 일이다. 그런데 농부와 결혼한 여자의 인생은 고생길이 활짝 열린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신이현 작가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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