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깃발 법(Red Flag Act)’에 대한 얘기를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증기기관을 토대로 산업혁명을 일으킨 영국은 19세기 초 세계 최초로 증기자동차를 상용화하였다. 자동차의 발전으로 불안을 느낀 마부들은 자동차 규제를 요구했다. 자동차 속도를 시속 4마일(약 6.4km) 이하로 제한하고, ‘붉은 깃발’을 든 기수가 자동차의 접근을 예고해야 하는 제도가 1865년 선포되었고 무려 30여 년간 유지되었다. 그사이 영국은 자동차 산업의 주도권을 독일과 미국에 완전히 내주고 말았다.
백 년여가 지난 지금, 영국은 ‘붉은 깃발 법’을 반면교사 삼아 금융 산업에서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있다. 영국은 세계 최초로 ‘규제 샌드박스(Regulatory Sandbox)’ 제도를 금융 산업에 도입하여 ‘핀테크’라는 새로운 금융 서비스의 출현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규제 샌드박스는 ‘기존의 규제에도 불구하고 규제의 적용을 일정 기간 면제함으로써 해당 기술·서비스의 효용을 테스트’할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사업자는 기술검증, 문제점 확인 등 서비스 완성도를 제고할 수 있고, 정부도 테스트 데이터를 통한 법·제도 개선을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다.
2016년 금융 산업 규제 샌드박스 도입 후 테스트를 진행한 기업 18곳 중 90% 이상이 시장 진입에 성공해 블록체인 기반 해외송금, 개인 금융활동 통합관리 플랫폼 등 혁신적인 핀테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싱가포르, 호주, 스위스 등 20개가 넘는 나라에서도 영국의 사례를 보고 핀테크 분야에서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시행하거나 도입을 추진 중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핀테크 분야를 넘어서 정보통신기술(ICT) 융합 신산업에 대한 검증까지 목표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9월 20일 ICT 분야에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하는 ‘정보통신융합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빅데이터, 5세대(5G) 이동통신, 인공지능(AI) 등 빠르게 변하는 ICT 환경에 맞춰 각종 법·제도를 선제적으로 정비하기가 어려운 현실 속에서, ICT 신기술·서비스가 기존 규제에도 불구하고 시장에 출시되거나 테스트될 계기가 마련됐다. 여야 모두 ICT 신산업 규제혁신의 필요성에 공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정부는 내년 초 제도 시행 전까지 준비에 만전을 기할 것이다. ICT 융합 신산업 업계 전반에 제도 설명을 강화하여 기업들이 잘 몰라서 규제 샌드박스를 활용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기업들의 수요를 반영한 ‘규제 샌드박스 적용 과제’를 사전에 발굴하여, 제도 시행과 동시에 필요한 기업들이 곧바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또한 제도를 도입한 취지에 충실하게, 신기술·서비스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저해하지 않는 등 문제가 없다면 적극적으로 규제 샌드박스를 지정할 것이다.
이런 노력을 통해 로봇과 드론의 성능을 다양한 환경에서 자유롭게 검증할 수 있게 되고, ‘자율주행차 군집 운행’ 테스트를 통해 교통 체증이 없는 도로가 구현될 수도 있지 않을까.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스타트업, 그리고 청년이 규제 샌드박스라는 ‘모래 놀이터’를 통해 꿈과 희망을 마음껏 펼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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