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미국 대선에 공화당 후보로 나섰다가 패배한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71)는 자칭 ‘평생 루저(loser for life)’다. 대선 당시 한 후원금 모금행사에서 “대선에 나갔다가 진 사람들은 ‘평생 루저’”라고 단언했다. “(낙선하면) 잔디 깎는 일자리도 제대로 못 구하더라”는 것이다. 이 발언은 그의 유세 뒷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밋(Mitt·2014년)’을 통해 공개됐다.
‘배수의 진’을 쳤다는 의미에서 내뱉은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에게 패했고 제 입에서 꺼낸 ‘평생 루저’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꼬리표로 달게 됐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롬니를 ‘루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통령만 못 됐다 뿐이지 정치인으로 크게 성공했고 사모펀드를 운영하면서 축적한 부는 최대 2억5000만 달러(약 2800억 원)에 이른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표를 던진 6100만 명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허탈감은 상당했을 것이다.
그런 롬니가 연방 상원의원 자리를 놓고 다음 달 6일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의의 심판대에 오른다. 모르몬교도인 그는 해당 종교의 총본산인 유타주에 출마해 당선이 확실시된다는 전망이 나온다. 정치분석매체 ‘538’이 예측한 롬니의 승리 가능성은 무려 99.9%(28일 기준).
미 공영방송 PBS는 롬니의 출마를 두고 “역사를 쓰고 있다”고 평가했다. 주요 정당의 대선 후보로 나섰던 사람이 대선에서 패한 뒤 초선 상원의원이 된 사례는 미국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존 케리나 존 매케인처럼 대선에서 지고 나서 상원의원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은 대선 전에 이미 베테랑 다선 의원이었다.
롬니가 출마할 수 있었던 직접적인 계기는 41년간 상원에서 유타주를 대표해 온 오린 해치 상원의원(84)의 은퇴 결정이었지만, 그의 측근인 마이크 레빗 전 유타 주지사는 굳이 ‘역사적 출마’에 나서려는 롬니의 심경을 6월 뉴욕타임스(NYT)에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정치 무대 한복판에 있었던 시절에 비해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백악관을 노리던 롬니의 가슴에 상원의원 배지가 성에 찰 리 만무하지만 ‘평생 루저’ 꼬리표를 떼려는 그에게 이번 중간선거는 6년 전의 깊은 상처가 조금이나마 아무는 계기가 될지 모르는 패자부활전 무대다. 오죽 절박하면 2016년 대선 당시 “트럼프는 가짜이며 사기꾼이다. 그의 공약은 ‘트럼프대학교’ 학위만큼이나 가치가 없다”고 맹비난하던 그가 올해 중간선거 유세를 시작하고 나선 “(트럼프의) 정책들은 효과적이었다. 그의 정책 다수를 지지한다”라고 말을 바꿨을까.
이번 중간선거 국면을 활용해 상처를 치유하려는 ‘평생 루저’들은 롬니 말고도 몇 명이 더 있다. 힐러리 클린턴은 이달 CBS, CNN과 연이어 인터뷰를 가지며 존재감을 드러내려 했고, 다음 달부터는 전국 13개 도시를 돌며 남편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함께 ‘스피치 투어’를 진행한다. 14년 전의 패배자 존 케리 전 국무장관 역시 9월 자서전을 출간하고 10월 중순까지 전국 17개 도시에서 북 투어를 가졌다. 출마만 안 했다 뿐이지 대중과 소통하며 잊혀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은 롬니와 다를 바 없다.
사실 이들의 ‘치유기’에 완전하고 최종적인 마침표가 찍히도록 할 수 있는 치료약은 ‘대선 재수 성공’ 하나뿐이다. 하지만 신비의 명약이 대개 그렇듯 손에 넣기가 좀처럼 쉽지가 않다. 20세기 이후로 미국 정치사에서 대선 재수에 성공한 인물은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 유일하다. 롬니는 물론이고 클린턴과 케리 모두 이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이들이 대선 재수에 본격적으로 나서기로 했다는 소식은 아직 들리지 않는다.
롬니는 당선이 되면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활동하기를 희망하고, 길게는 재선까지 노리고 있다고 사석에서 말한다고 한다. 매일 출퇴근길 눈에 밟힐 백악관을 바라보며 어딘가 모를 씁쓸함을 참아낼 수 있다면, 그렇게 완전히 아물긴 어려운 ‘평생 루저’의 상처가 도지는 것만 막아낼 수 있다면 그의 올해 늦가을 ‘패자부활전’은 성공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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