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고전서적과 예술작품에서 사과처럼 이야기에 많이 등장하는 과일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는 것 같다. 황금사과로부터 시작된 트로이 목마와 그리스 신화….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지역인 사마르칸트는 아라비안나이트에 등장하는 마법 사과의 탄생지이다. 서양인들이 하루 한 알의 사과로 건강을 챙길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전 오랫동안 돌았던 이야기다. 17세기 밀턴의 실락원 이후 아담과 이브 하면 사과를 떠올리게 되었지만 그 이전까지는 사과처럼 정확히 표현된 이미지가 아니었다.
중앙아시아가 원산지인 사과는 야생에서는 작고 새콤한 것이 특징이다. 요즘에도 자생하고 있다. 오랫동안 아시아와 유럽에서 키워졌지만 16세기 영국에서 크게 품종이 개발된 이후 17세기 아메리카로 옮겨져 전 세계로 확산됐다. 현재까지 7500여 종이 개발됐다.
1980년대 나는 뉴욕 맨해튼의 유니온스퀘어 근처에서 일을 했다. 요즘엔 거의 매일 오픈해 관광객으로 더 붐비는 그린마켓이 당시에는 평일에 주차장이, 주말엔 그린마켓이 열리는 장소였다. 근교의 농장에서 직접 키운 농산물과 수제 가공식품, 빵, 쿠키와 파이 등 먹거리가 대부분이었다. 신선하고 저렴한 가격 덕에 일주일 치 장을 보려고 주말을 기다리는 뉴요커가 많았다.
그 시장에서 이맘때가 되면 유기농, 무농약, 일반 사과로 구분돼 원하는 만큼 살 수 있다. 직접 만든 잼과 애플사이다도 꼭 사게 되는 물건이다. 해가 질 무렵 농장주들은 팔고 남은 물건들을 근처 단골식당과 연결해 박스 단위로 헐값에 거래하기도 한다. 짐을 챙겨 다시 농장으로 돌아가기 전 저녁식사로 사과 값을 대신하기도 했다.
맛있고 보기 좋은 사과를 개발하고 보전하려는 노력은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우량종으로 인정되는 사과는 씨로는 보전하기가 힘들어 가지치기로 번식시킨다. ‘그라니 스미스’라는 초록사과는 호주 시드니에서 개발돼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사람들 대부분은 밝은 주황색이 돋보이고 바닥 부분이 노르스름한 사과를 달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사과를 생산하기 위한 농장주들의 노력은 대단하다. 큰 사과를 얻기 위해 작을 때 종이에 싸 두었다가 커진 후 사과 잎들을 제거하고 반사시트를 이용해 햇빛의 일조량을 높인다.
반면 자연 그대로 방치한 상태에서도 맛과 영양을 고스란히 간직한 사과가 있다. 크기도 일정하지 않고 붉고 푸른 얼룩이 있지만 더 달고 매력적인 맛을 느낄 수 있다는 평가다. 요즘 일본에서 더 선호하는 사과가 됐다.
나의 20대 시절 어느 가을, 영국 서머싯을 여행했을 때다. 오래된 마을 안 고택들 사이 군데군데 잘 정리된 사과 정원과 나뭇잎 사이로 파란하늘과 햇살이 내려앉았다. 주변엔 떨어진 사과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사과를 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사과를 기다렸다가 주워 애플 사이다를 만들어야 제대로 된 맛이 난다는 것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사과나무와 발에 차이는 사과, 그 길을 걸으면서 나는 문득 뉴턴을 떠올렸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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