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뿔소는 거구이지만 초식이라서 근본적으로 공격적이지 않다. 하지만 위험한 상황에 놓이면 본능적으로 달려드는 행동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코뿔소의 온순함에 방심하고 함부로 행동을 했다가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지만 소홀히 하거나 간과해서 발생할 수 있는 위기를 ‘회색 코뿔소(grey rhino)’라고 부른다.
우리가 경험하는 대형재난은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도 있지만 상당수가 수차례의 위험신호가 있었음에도 대비하지 않은 결과인 경우가 적지 않다. 비상구 앞을 물건 보관 창고처럼 사용하다가 화재 시 통로가 폐쇄되어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상황이 한 예이다.
9·11테러 당시 글로벌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의 기적’을 잘 알고 있다. 보안책임자 릭 레스콜라가 1분 1초가 아깝다고 하는 회사의 특성을 무릅쓰고 매년 4회씩 8년간이나 전 직원을 대상으로 비상대피 훈련을 반복했기에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2000명이 넘는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레스콜라는 1988년 12월 팬암 항공기 폭파 테러사건을 계기로 경계와 대비 강화가 절실하다고 주장하고 이를 강력하게 실천에 옮겼다고 한다.
‘이상지계(履霜之戒)’라는 말이 있다. 서리가 내리는 것은 얼음이 얼 징조이므로 미리 대비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조선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간 문인 조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술 마신 잔을 깨버리고 어린아이에게 장난을 치는 거친 행동을 보고 일본의 침략을 예견했다. 조헌은 왜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으나 무시를 당하자 낙향해 왜란에 대비하고 의병장이 돼 목숨을 바쳤다.
재난을 막으려면 철저한 대비와 예방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설마 하는 마음에 대비를 미루다가 재난이 발생하면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많이 봐 왔다. 왜적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을 무시하고 궤변을 폈던 대신들이 막상 전쟁이 나자 뿔뿔이 흩어져 목숨 보전에 급급했던 것이 생각난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에게 상처가 되고 화합을 저해할 뿐이다.
‘모기 보고 칼 빼기’라는 속담이 있다. 작은 일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대책을 세운다는 뜻이다. 효율적인 대처가 아님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문구지만 재난 대비에는 훌륭한 경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사실 안전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은 일면 귀찮고 번거로우며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기껏 모기 한 마리에 칼을 빼드는 것이 현실적이지는 못하겠지만 작은 것이라도 위험 요인을 제거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효율성으로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11월 9일은 56주년을 맞는 ‘소방의 날’이다. 소방의 날이 시작된 출발점은 ‘화재 예방의 날’이었다. 소방의 날이 단순히 기념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뒤를 돌아보고 새로운 다짐과 실천을 시작하는 날이 되기를 기대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