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면 누구든 존엄하다고 배웠다. 존엄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든 원하는 그 무엇이 될 수 있다고도 배웠다. 배웠다기보다는 믿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배움의 대상은 사실이고, 믿음의 대상은 희망이니까. 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계속 믿어왔다고 말하는 편이 맞다.
희망은 때로 왜곡된다. 전체의 희망은 개인에게 강압이 되기도 한다. 모두들 그렇게 될 수 있으니, 되지 않으면 마치 제대로의 인간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우리에게 되어야 하고 될 수 있어야 하는 ‘무엇’은 대개 훌륭하거나, 대단한 사람을 의미한다. 마치 나의 원래 의미는 텅 비어 있고, 남들에게 인정받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만 제대로 사는 듯 모두들 생각한다. 그런데 모두가 일등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뭐가 되어야만 되는 걸까. 그냥 앉아 있는 인간은 스스로를 모멸해야만 할까. 열심히 하지 않고 싶을 때 텅 비어 있으면 안 되는 걸까. 이때 시인의 시를 읽어본다. ‘별들이 사는 집은 내 마음의 빈 터에 있다’는 시를 읽어본다. 저 별들이나 빈 터는 무엇이 되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냥 거기에 있었다. 다음 구절을 연달아 읽어본다. ‘뒷산 상수리나무 잎이 서걱거리는 저녁’이라는 말을 음미한다. 서걱거린다는 것은 낙엽이 되었다는 말. 곧 떨어질 날이 찾아온다는 말. 잎사귀의 마지막 언어를 음미하기 위해서 내 마음은 아무것도 되지 않고 텅 비어야 할 필요가 있다.
시인이 말했던 가을의 저녁이 찾아오는 요즘이다. 마음에 빈자리가 있어야 별빛도 비추이고 낙엽 소리도 들어온다. 아무것도 되지 않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가장 좋은 순간, 깊은 의미가 찾아오기도 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