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를 소재로 한 할리우드 영화 ‘제로 다크 서티’의 한 장면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소속 요원이 한밤중에 쿠웨이트의 나이트클럽에서 정보원 역할을 하던 아랍인에게 부탁을 했다가 거절당했다. 9·11테러 사건의 주범 오사마 빈라덴 은신처를 추적하던 이 요원은 곧바로 람보르기니 매장으로 가서 우정을 확인하자고 했다. 정보원이 노란색 모델을 골랐다. 40만 달러(약 4억4700만 원) 정도의 최고가였다. 이 요원은 CIA 상관을 설득해 이미 공작비를 받은 뒤였다.
이 요원은 차량과 함께 종이쪽지를 건네며 “전화번호를 구해 달라”고 한다. 빈라덴 최측근의 어머니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얼마 뒤 번호를 입수한 CIA는 통화기록과 위치추적을 통해 어머니가 몇 달 동안 6개의 다른 전화를 사용하고, 같은 휴대전화를 2번 이상 사용하지 않는 수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 단서로 CIA는 아프가니스탄의 빈라덴 은신처를 찾아낸 뒤 2011년 5월 사살했다.
국가정보원의 ‘흑금성’ 공작원으로 활동한 박채서 씨가 수감 중에 쓴 수기를 바탕으로 제작한 한국 영화 ‘공작’. 박 씨가 김정일 당시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첫 면담 성사에 결정적 역할을 한 보위부 실세에게 롤렉스시계 2점을 선물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들과 딸의 혼례를 앞두고 있던 이 실세가 경제적 사정으로 혼수품 구입이 여의치 않다는 사정을 박 씨가 파악한 것이다. 박 씨는 국정원 공작비로 세운상가에서 진짜 같은 가짜를 200만 원에 샀다. 정품은 7만 달러(약 7800만 원)였다. 보위부 실세는 “공화국법이 허용하는 한 돕겠다”며 태도가 바뀌었다고 한다.
비밀스러운 전쟁을 벌이는 정보기관은 공작비의 용처에서 작전의 성패가 갈릴 때가 많다. 그러나 검찰이 올 2월 기소해 재판 중인 ‘대북공작비 유용 사건’을 보면 말문이 막힌다. 대북공작단장과 국장, 차장 등을 지낸 국정원 고위 간부가 보수정권 시절 대북공작비로 서울 시내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을 마련한 뒤 국정원장이 사적으로 쓰도록 한 사실이 드러났다. 공작비 사용명세를 국정원 기조실에 보고하지 않도록 대북공작국 내부 지침을 뜯어고친 일도 있었다. 북한 핵 및 최고위층 정보 수집에 사용해야 할 돈을 엉뚱한 곳에 쓴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국정원법 개정안이 올 1월 국회에 제출됐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의원 85명이 발의했다. 여기엔 그동안 국정원이 하지 않았던 대북공작비 지출 결과 보고를 국회 정보위원회에 해야 하는 조항이 있다. 원장이 승인한 별도 기밀 예산 집행명세도 정보위원 3분의 2 이상의 요구가 있으면 정보위에 보고해야 한다. 미국처럼 의회가 정보기관 예산과 활동을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보기관의 권력 남용을 막고, 정권 교체와 관계없이 정보기관이 일관된 정보수집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개정안을 심의할 정보위 위원장은 야당 몫이다. 국정원은 잔뜩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개정안은 10개월째 정보위에 상정조차 안 됐다. 야당은 대공(對共)수사 약화는 신경 쓰면서 개정안엔 관심이 없다.
“과거 의원들은 국가 정보와 관련한 문제에 대해 덜 알수록 더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 이제 덜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알기 위한 노력 그리고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이다.” 미국에서 의회의 CIA 통제권을 강화하기 위한 논의가 처음 시작됐던 1970년대 중반 한 야당 지도자가 한 말이다. 국정원의 반복된 불행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우리 국회가 더 많이 아는 부담을 떠안아야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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