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신호등이 깜박이자 모두가 일제히 전력질주를 시작한다. 아주 지각한 것만 아니라면 나는 되도록 뛰지 않는 편을 택한다. 신호등을 기다리는 2분 남짓한 ‘허락된 무료함’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것 또한 좋아한다. 이동 시간이 길면 길수록 좋다. 차창 밖으로 흩어지는 풍경을 눈에 담으며 죄책감 없이 ‘낭비’할 수 있는 시간을 즐긴다. 이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은 그러지 못한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제는 제법 유명해진 ‘멍 때리기 대회’라는 게 있다. 현대인의 뇌를 쉬게 하자는 의도로 2014년 처음 시작해 꾸준히 열리고 있다. 규칙은 간단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오래 유지하는 것. 참가자들은 심박측정기를 지닌 채 3시간 동안 말을 하거나 움직일 수 없는 것은 물론, 음악을 듣거나 시간을 확인할 수도 없다. 잠깐이라도 졸 경우 가차 없이 탈락이다. 처음엔 다들 뭐 이런 대회가 다 있나 의아해했지만 점차 취지에 공감하는 모습이다.
현대인은 대개 ‘시간 효율 강박’에 시달린다. 새롭지 않은 사실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강요되어온 시간 절약의 미덕 탓이다. 20대의 내 다이어리 첫 장에도 늘 ‘시간이 없어 무언가를 못 하는 사람은 시간이 있어도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다’라는 어디에서 들었는지도 모르는 경구가 적혀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는 비생산적인 시간, 빈둥거리는 시간은 나태, 무능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스티브 잡스를 필두로 창의인재가 각광받는 시대에 이르러서야 뒤늦게 적절한 휴식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책이 한동안 서점가를 휩쓸기도 했지만, 쉼조차 ‘투두 리스트(To-do List)’를 작성하는 것이 여전한 현실이다.
특히 요즈음에는 이러한 강박이 콘텐츠 소비문화와 맞물려 새로운 양태로 펼쳐진다. 20대 전문 연구기관인 대학내일에 따르면, 요즘 세대는 적막에 대한 거부감과 효율적 시간 사용에 대한 강박으로 팟캐스트(인터넷라디오)나 브이로그(일상을 담은 영상콘텐츠) 등 스트리밍 콘텐츠를 선호한다고 한다. 빈 시간을 빈 상태로 남겨두지 못하고 무언가를 듣거나 보면서 여백을 지운다. 밥을 먹거나 길을 걸으면서도 콘텐츠를 소비하는, 바야흐로 멀티태스킹의 일상화다.
가장 최근 ‘무료함’을 느껴 본 게 언제일까. 대부분이 재미없는 영화를 봤을 때 정도일 것이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하고, 채워지지 못한 시간, 이름 붙지 못한 하루에 죄의식을 가진다.
가끔은 용도 없는 시간도 필요하다. 죄책감 없이 낭비할 수 있는 그런 시간 말이다. 멍 때리기를 조금 더 격상시켜 표현하면 명상, 사색이다. 비워야 채울 틈이 생긴다. 효율이라는 명목하에 모든 시간을 여백 없이 빼곡히 채우기만 한다면 그 어느 틈으로도 내적 대화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멍 때리기는 뇌 건강에도 큰 도움을 준다고 하니, 이제 그만 해묵은 죄책감을 거두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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