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네 할머니 댁에 놀러갔다가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전쟁 통에 부모를 잃은 할머니는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신랑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혼례 당일 신랑 얼굴을 처음 보았다고 했다. ‘할머니 그때 기분이 어땠어요?’ ‘무서웠지. 할아버지 인상이 워낙 험상궂어 가지고…’ ‘그럼 그날 첫날밤도 치렀어요?’ ‘무슨! 동네 사람들이 문풍지에 구멍 뚫고 쳐다봐서, 벌벌 떨면서 이불만 뒤집어쓰고 있었지.’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도 없는 공포의 결혼 문화. 하지만 할머니 세대에선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고작 두 세대 거쳤을 뿐인데 세상이 이렇게 바뀌다니. 우리 다음 세대는 어떠려나?
‘그때 되면 동성결혼도 법제화되겠지? 네가 낸 축의금 회수할 수 있겠다.’ 레즈비언 친구는 째려보며 말했다. ‘그때 가서 하라고? 할머니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이야?’ 잊고 있었다. 우리가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을. 시기상조라고 하는 사람들 말을 따르다간 아주 장례 치르고 나서 결혼하겠어!
마음이 조급해졌다. 한 번뿐인 인생, 시대가 그러하다는 이유로 참고 살다가 나중에 ‘사실 그거 안 그래도 되는 건데?’ 한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그땐 왜 그랬어요?’ ‘그땐 그게 맞는 줄 알았지. 다 그러고 살았단다….’ 다 그러고 살기는 무슨. 동성결혼을 법적으로 허용한 나라는 영국, 미국, 프랑스 등등 전 세계적으로 26개국이나 되고, 시민 결합 제도를 통해 동성 커플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나라까지 포함하면 총 44개국이나 되는데!
인권 문제는 늘 이런 식이었다. 누군가에겐 지금 당장의 문제인데, 자기 일 아닌 사람들이 차별의 말을 보태고, 결정권을 가진다. ‘니가 나로 살아봤냐? 아니잖아!(이거 장기하와 얼굴들 새 앨범 노래 가사 요즘 유행이길래 넣어보았습니다.)’ 이젠 지긋지긋하다. 기술의 문제라면 기다려야겠지만, 인식의 문제라면 더 이상 미룰 필요가 없다. 대안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시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성소수자 인권에 나중은 없다. 지금 우리가 바꾼다. ‘적극적으로 혐오를 조장하고 차별을 선동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중립을 표방하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책임 있는 행동이 필요하다.’ (홍성수의 ‘말이 칼이 될 때’에서)
불구경이 가능한 이유는 멀리 있기 때문이다.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고 프레디 머큐리의 삶에 감동해 눈물을 흘리지만 현실 속엔 게이 없다고, 내 주위엔 성소수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소수자는 어디에나 있다. 이태원에도 있고 강남에도 있다. 전라도에도 있고 경상도에도 있다. 강의실에도 있고 맥도날드에도 있다. 당신의 회사 동료이거나 친구, 가족일 수도 있다. 차별은 누군가의 존재를 없는 것으로 만드는 데서 시작된다. 당신은 누군가가 믿고 커밍아웃할 수 있는 상대인가? 지금 내 곁에 엄연히 존재하는 이들에게 무해한 사람인지 돌아보아야 할 때다. 3일 KBS2 ‘대화의 희열’에 출연한 ‘전국노래자랑’의 MC 송해는 퀴어축제에 대해 언급했다. ‘세계적인 운동. 이런 변화도 우리가 체험을 하는구나. 정말 배울 점이 많다.’ 참고로 그의 나이는 올해로 92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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