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이헌재]‘정치쇼’ 이후 길 잃은 한국 야구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16일 03시 00분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그 우승(아시아경기 금메달)이 그렇게 어려웠다고 생각지 않는다.” 지난달 국회 국정감사에서 손혜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조소하듯 내뱉었다. 증인으로 출석한 선동열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대상이었다. 선 감독은 현역 시절 ‘국보’로 불린 대투수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에서 감독으로 야구 대표팀 금메달을 이끌었다.

선 감독을 증인으로 부른 이유는 대표 선발 과정에서 일부 선수에게 특혜를 줬다는 의혹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시종 목소리를 높였지만 알맹이가 없었다. 근거 없는 의혹으로 선 감독을 몰아칠 뿐이었다. “연봉은 얼마나 받나” 등의 질문 뒤엔 “사과를 하거나, 사퇴를 하시라”고 소리쳤다.

애당초 이 건이 국정감사거리인지 의문을 표하는 사람이 많았다. 확실한 증거도 증언도 없었다. 일부 그런 여론이 있다는 게 선 감독이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된 이유였다. 정치인인 손 의원은 선 감독을 국정감사에 불러들여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국 국가대표 감독으로는 사상 처음 국정감사 증인석에 선 선 감독은 수모를 견뎠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겠지만 고개를 숙였다. 그는 “병역 특례에 대한 시대적 비판에 둔감했고, 금메달이라는 목표에 매달려 시대의 정서를 살피지 못했다”며 사과했다.

그로부터 10여 일 후. 정운찬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가 국감장에 섰다. 증인은 정 총재였지만 내용은 또 선 감독이었다.

정 총재의 답변은 지나치게 ‘정치적’이었다. 손 의원이 “야구 국가대표에 전임감독제가 필요한가”라고 묻자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선 감독은 지난해 임명돼 2020년 도쿄 올림픽까지 팀을 맡기로 한 전임감독이다. 손 의원이 “선 감독이 TV를 통해 선수들을 관찰했다”고 지적하자 정 총재는 “그건 선 감독의 불찰”이라고 답했다. 손 의원의 비위는 맞췄을지 몰라도 선 감독의 가슴엔 비수처럼 날아든 말들이었다.

평소 TV를 통해 선수들을 관찰하는 선 감독은 정말 판단이 필요한 순간엔 현장에서 직접 선수들을 지켜봐 왔다. 전임감독제 역시 전임 총재 시절 고민 끝에 나온 산물이다. 한 야구계 인사는 “조직의 수장으로서 당연히 선 감독을 보호하는 게 옳았다. 수장이 지켜주지 않는데 밑에 있는 누가 진심으로 그 사람을 믿고 따르겠는가”라고 했다.

선 감독은 2018 한국시리즈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14일 감독직 자진 사퇴를 발표했다. 선 감독과 면담한 정 총재는 문을 막아서면서까지 만류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간의 행동과 발언을 생각하면 선 감독이 진정성을 느끼기 힘들었을 것이다.

선 감독의 갑작스러운 사퇴로 한국 야구 대표팀은 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2019 프리미어12와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사령탑을 잃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독이 든 성배’로 불리는 대표팀 감독직을 선뜻 떠맡을 적임자를 찾기 힘들 수도 있다. KBO는 “현재로선 아무 대책이 없다”고 한탄하고 있다.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누구나 안다.

선 감독은 사퇴 기자회견문에서 “어떠한 경우에도 정치와 스포츠는 분리되어야 마땅합니다”라고 했다. 그렇게 한국 스포츠는 또 한 명의 영웅을 떠나보냈다.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uni@donga.com
#선동열#야구 국가대표팀#국정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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