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는 바칼로레아(논술형 대입자격시험) 철인 6월에도 이 문구를 보기가 힘들다. 그런데 일 년에 두 번, 1월과 5월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대규모 전시장 파르크 덱스포지시옹(Parc d’Exposition)의 전광판에 이 문구가 뜬다. 파리의 의대 1학년생들이 2학년으로 올라가는 시험을 보러 여기에 모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학교에서는 이 시험만이 유일하게 모두 객관식으로 치러지고 컴퓨터 사인펜으로 답안을 기입한다. 이 시험만 점수에 따라 등수가 매겨지고 당락이 결정된다. 바칼로레아는 대학입학시험이지만 전 과목이 100% 논술이고 절대평가이니, 이 시험이야말로 ‘프랑스판 수능’인 셈이다.
아들이 파리 의대에 들어가자, 한국의 지인들은 “대단하다”고 난리였다. 하지만 사실 프랑스에서 의대 입학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바칼로레아에 통과하면 누구나 의대에 입학할 수 있다. 바칼로레아는 평균 50점만 넘으면 합격이고 추가 시험의 기회까지 있어서 바칼로레아 합격률은 매년 80%를 넘는다. 바칼로레아는 대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 실력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시험이다.
아들은 현재 파리5대학(데카르트) 의대에 다니는데, 사실은 2지망으로 지원한 학교였다. 주소지에 따른 무작위 추첨에 의해 이 학교에 ‘배정’된 것이지 바칼로레아나 내신 성적에 따라 선발된 것이 아니다. 이렇게 의대의 입학 문턱은 아주 낮지만, 2학년으로 올라가는 관문은 오히려 아주 좁다. 첫해에 단 14%만 2학년으로 올라갈 수 있고, 재수의 기회는 딱 한 번뿐이다. 재수에 실패하면 프랑스에서는 어떤 의대에도 다시 들어갈 수 없다. 그 대신 전공을 바꾸거나 편입할 수 있다.
아지즈는 바칼로레아 점수가 아주 높았지만 의대 1학년을 통과하지 못하고 생물학과에 편입했다. 그래서 의대의 이런 선발 방식이 박탈감을 주고 평생 상처가 된다는 비판도 있다. 반면 보리스는 바칼로레아 점수는 별로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의대에 들어갈 수 있었고 악착같이 공부해서 재수 끝에 2학년으로 올라갔다.
공부가 어렵고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의대 1학년 때는 시험 직전에 서로 공책을 숨기거나 훔치는 일도 있다. 프랑스 학교에서는 유일하게 철저한 상대평가로 당락이 결정되는 의대 1학년에서만 일어나는 살벌한 풍경이다. 그런 의대생들도 2학년 때부터는 다른 과처럼 절대평가로 시험을 보게 되면 너그러워져서 서로 격려하는 훈훈한 풍경이 펼쳐진다. 아들도 2학년에 올라간 뒤 학생회에 들어가 족보와 답안 해설지를 만들고 1학년 학생들의 멘토링을 해줬다. 그러나 4학년이 된 지금도 계속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다. 탈락의 공포는 없어졌어도 공부가 점점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일반적으로 대학생이 고등학생보다 열심히 공부한다. 바칼로레아 점수는 향후 공부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고, 바칼로레아 점수가 좋거나 나빠도 대학 입학 기회는 거의 공평하다. 똑같이 다시 ‘0’에서 출발해 열심히 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가 없다. 바칼로레아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어제 수능을 보는 대녀(代女)에게 격려 문자를 보내는데, 내가 왠지 긴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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