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말만 하면 “북한의 대변인이냐?”라는 야당의 비판을 듣는 청와대는 억울할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향해 쏟아낸 말과 비교하면 그럴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랑 고백’을 했다. 9월 말 중간선거 유세 도중 “나는 그(김정은)를 좋아하고, 그도 나를 좋아한다.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We fell in love)”라고 말했다. 지난달 CBS방송 시사 프로그램 ‘60분’과의 인터뷰에서 레슬리 스탈 기자(77)는 사랑 발언을 물고 늘어졌다.
▽스탈=그(김정은)의 이력서를 읽어주고 싶습니다. 그는 억압 강제수용소 기아(飢餓)의 잔혹한 왕국, 이복형을 암살하고 노예노동과 공개처형이 자행된다고 알려진 그런 왕국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당신이 사랑한다고요?
▽트럼프=나도 모든 걸 알고 있어요. 나는 아기(a baby)가 아니란 말입니다.
▽스탈=(아기가 아니란 걸) 나도 아는데요, 왜 이런 사람을 사랑하는 거죠?
▽트럼프=그건 그저 비유적 표현이라고요.
▽스탈=그는 나쁜 사람(a bad guy)이잖아요.
▽트럼프=그냥 있는 그대로 봅시다. 나는 그와 매우 잘해 오고 있고, 호흡도 잘 맞아요. 끔찍했던 (북핵) 위협들을 생각해 보세요. 이젠 더 이상 (그런) 위협이 없잖아요.
흔히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사랑하는 이가 원하는 걸 줄 생각은 없어 보인다. 인터뷰에서 “‘대북제재 완화’를 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의 언행도 크게 다르지 않다. 9월 한국 정부의 대북특사단을 만난 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핵탄두의 소형화 경량화를 준비하고, 미사일 기지도 그대로 운영하고 있다’(정보기관의 국회 보고). 16일 조선중앙방송은 “(김 위원장이) 새로 개발한 첨단전술무기 시험을 지도하셨다”고 보도했다. 미국이 원하는 ‘핵시설 신고 리스트’에 대해선 “말도 꺼내지 말라”는 태도로 일관한다.
호흡과 궁합이 맞는다는 트럼프와 김정은은 입으로는 “사랑한다” 하면서 몸으로는 상대와 멀어지는 행동을 하고 있다.
둘의 중재자를 자처해 온 한국 정부만 입이 마르고, 몸이 꼬인다. 트럼프의 중간선거 승리를 염원했고, “대북제재 완화 조금만 해주면 안 될까요”라고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남북관계 과속하지 말라”는 미국의 공공연한 압박도 견뎌내고, ‘냉면 목구멍’ ‘배 나온 사람’ ‘관념 없는 시계 주인’ 같은 북한의 어이없는 면박도 참아낸다.
이런 모습을 목도하다 보면 ‘누구를 위한 중매이고, 무엇을 위한 중재인가’라는 의구심이 조금씩 움터난다. ‘제 살길’만 찾는 트럼프와 김정은 사이에서 ‘우리 살길’도 잘 찾고 있는 걸까. “혹시 중매하다가 짝사랑에 빠졌나. ‘나쁜 남자’에게 무슨 약점 잡혔나”라는 상상(想像) 걱정도 늘어간다.
“내가 왜 중매꾼이냐. 한반도 문제의 책임자로서 이 자리를 만든 것이다.”
‘6·12 북-미 공동성명’보다 더 체계적인 비핵화 로드맵으로 평가받는 ‘2005년 6자회담 9·19 공동성명’에 관여했던 한국 대표의 회고. 남북미 3자 회동에서 북한 대표가 “꼭 이렇게 중매꾼이 있어야 대화가 되느냐”고 미국 대표에게 퉁명스럽게 말하자 이렇게 화를 냈다 한다.
13년이 지나 북한이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돼 버린 지금, 한국 대표들은 중매꾼인가?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이자 책임자인가?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다면 ‘제3의 무엇’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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