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타가 되지 않겠다. 전설이 될 것이다.” 영국의 전설적인 록밴드 ‘퀸’을 이끌었던 프레디 머큐리가 한 말이다. 머큐리가 록음악계의 전설이라면 ‘검은 피카소’라 불리는 장미셸 바스키아는 스타가 된 최초의 흑인 화가이자 현대미술의 전설이다.
1960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바스키아는 17세 때 고등학교를 자퇴한 후 거리의 예술가가 됐다. 정규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그에겐 뉴욕의 거리가 갤러리이자 캔버스였다. 원래 그라피티는 불법이고 하위문화였지만 그의 강렬하고 에너지 넘치는 그라피티는 미술 전문가들까지 매혹시켰다. 1980년 그룹전 ‘타임스스퀘어쇼’에 참가한 이후 1982년 뉴욕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같은 해 세계적 권위의 ‘카셀도쿠멘타’ 전시에 최연소 작가로 초대됐다.
낙서를 예술로 승화시킨 바스키아의 그림은 상징과 은유, 유머로 가득했다. 인종 문제, 빈부 갈등, 죽음, 역사, 종교, 자전적 이야기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 그의 그림들은 사회를 향한 아웃사이더들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이 그림은 바스키아가 22세 때 그린 자화상이다. ‘조니펌프’는 브루클린에서 쓰는 방언으로 거리 모퉁이에 설치된 소화전을 말한다. 여름철이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됐던 조니펌프에서 바스키아는 강아지와 함께 신나는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무도 지적인 추상미술이 주류였던 시대, 어린아이 낙서처럼 친근하고 익살스러우면서도 강렬한 그의 회화는 워홀의 팝아트만큼이나 대중의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전설은 전설을 알아보는 걸까? ‘팝아트의 교황’ 앤디 워홀이 그의 멘토이자 작업 파트너였고, ‘팝의 여왕’ 마돈나가 연인이었다. 바스키아는 당대 최고의 스타였지만 너무 이른 성공의 부담과 창작에 대한 압박감, 갑작스러운 워홀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을 견디지 못하고 약물에 의존했고, 결국 27세에 헤로인 중독으로 요절했다. 짧은 생애 동안 무려 20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긴 바스키아는 그렇게 스스로 전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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